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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가 이경해
농민운동가 이경해
  • 위병기
  • 승인 2018.09.10 1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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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일) 장수 한국농업연수원에서는 농민운동가 이경해 열사 15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한국 농어민 후계장 연합회장, 스위스 제네바 UR반대 할복, 한국 농어민 신문사 회장, FAO(유엔식량기구) 농부상 수상, 제 4,5,6대 전북도의원. 그의 프로필이다.

한마디로 그는 행동하는 농민운동가였다. 1947년 장수에서 태어난 그는 56세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한국 농업의 어려움을 전세계에 알렸다.

1990년 스위스 제네바 WTO 본부에서 아더던켈 사무총장을 면담하고 나오면서 이경해는 한국 농업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할복을 기도했다. 공산품뿐 아니라 농산품도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의 물결이 전세계를 휩쓸던 시절,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한 농민운동가의 할복은 그 울림이 무척 컸으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 거대자본은 당초 수순대로 ‘농산물 개방’을 밀어부쳤다. 급기야 이경해는 멕시코 칸쿤에서 2003년 9월 10일 WTO 반대 집회 중 할복 자살했다. 그의 장례는 세계농민장으로 치러졌다.

이경해 열사는 일찌감치 ‘학사부부 농민’으로 유명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누구나 화이트 칼라가 당연시되던 시절, 이경해-김백이 학사 부부는 장수의 야산을 개간해 농장을 마련했다.

한때 6만 평 규모의 큰 농장에 100마리의 젖소를 길러내는 학사부부 농민은 한국농업의 성공 모델로도 꼽혔다. 주위 50여 농가도 높은 수익을 올리던 그를 따라 모두 낙농에 나서면서 장수군 일대엔 한때 목축 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열심히 농사를 지었으나 거대 축산자본과는 경쟁자체가 되지 않았다. 암울한 그때(1991년) 지방자치가 부활하면서 정치권의 권유로 그는 전북도의원 선거에 나서 내리 3선을 하게된다. 농민운동을 농사가 아닌 정치로 할 수 있을거란 기대가 컸다. 도의원 시절 농업과 농민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후 모진 시련이 닥친다. 초선의원때 어느 겨울날 장수로 귀가하던 그는 눈길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를 잃고 자신도 크게 다치면서 어린 세딸을 혼자 키워내야 했다.

조강지처를 잃은 그는 잇따른 경제난과 군수선거에서의 실패 등으로 크게 상심하게 되고, 이후 천직인 농민운동으로 되돌아가 활동하다 끝내 파란만장을 삶을 마감하게 된다.

칸쿤에서 그는 가슴에 칼이 꽂힌채 “Who kills farmers(누가 우리 농민을 죽이는가?)”라고 마지막으로 외쳤다. 아직도 그의 물음은 계속되는 듯 하다.


위병기 문화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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