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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전주 ‘책방’ 골목을 가다
[참여&소통 2018 시민기자가 뛴다] 전주 ‘책방’ 골목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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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0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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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을 위한 작은 길인 동문거리
이어진 폐업 탓 두 곳만 남은 상태

새내기 대학생이었을 때, 전공 강의를 수강하면서 이 길은 아니라는 깨달음과 함께 수강을 취소했다. 그리고 그 결단과 함께 손에 든 전공 서적은 쓰임새를 잃었다.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책이란 기껏 종이뭉치에 지나지 않는 법, 그렇게 전공서적은 ‘귀하신 몸’에서 ‘종이뭉치’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 ‘종이뭉치’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거금 4만 원 들인 전공 서적을 폐지 취급하기에는 주머니가 너무 가벼웠다.

그때 처음으로 전주 동문거리의 책방을 찾았다. 누군가의 ‘종이뭉치’를 모아 다른 이의 책으로 만들어 주는 이곳은 책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꽤 유명한 ‘노다지’요 동시에 책을 팔려는 사람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구원자였다. 그 구원자가 내게도 임하길 기대하며 전에 추천받은 책방에 들러 전공 서적을 내보일 때, 책방 주인아저씨가 무심결에 남긴 한마디가 꽤 아프게 다가왔다.

“학생, 책이 정말 깨끗하네?” 가게 주인의 말이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자격지심으로 인한 창피함과 패배감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래도 깨끗한 만큼 좋은 값을 치러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해보지만 주인아저씨의 민머리 옆으로 보이는 책장에서 내가 들고 온 책과 똑같은 책을 보게 되면서 기대는 사라지고. 결국 동문거리 책방에서의 첫 거래는 손에 있던 두꺼운 책이 2000원으로 바뀌면서 그렇게 끝났다. 동문의 헌책방은 그런 곳이었다.

△책방골목의 시작 그리고 지금
 

경원동 풍년제과 본점에서 한옥마을 방향으로 걷다 보면 동문거리를 마주한다. 옛 향취가 고르게 묻어나오는 이 거리는 전주사람들에게 ‘홍지서림 골목’으로 더 유명하다. 80년대 홍지서림이 뿌리를 내린 자리에 헌책방이 뒤이어 하나둘씩 자리를 잡으면서 이곳은 전북을 대표하는 책방골목이 됐다. 전성기 때는 30여 곳에 이르는 헌책방이 자리 잡고 있었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10여 곳의 책방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줄줄이 폐업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딱 두 곳만이 남아 책방골목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지경이 됐다. 길을 찾아주던 동문거리의 헌책방이 지금은 자신의 길을 잃은 것일까?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누군가에겐 역사였던 이곳의 헌책 냄새가 이제 조금씩 그 자리를 떠나가고 있다.

“옛날에는 정말 많았었지.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문닫고, 나가고…” 책방골목의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서점주인 A씨는 골목이 생기를 잃어가는 오늘이 아쉽기만 하다. 문을 닫아가는 책방과 줄어드는 손님,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예전과 달리 젊은이들이 헌책방을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학생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찾던 청춘의 발길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옛날에는 참고서나 서적을 구하는 학생들이 많이 왔었죠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이 오는 경우가 없어요 대부분 손님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죠.”

이 거리에는 전주시에서 지정한 ‘전주미래유산’임을 증명하는 명판이 2개 달려있다. 전주의 어제가 만들어진 장소이며 동시에 오늘로 이어진 역사가 내일까지 존속해야 할 장소라는 의미다. 하지만 젊은이의 발길이 자취를 감추는 곳은 미래로 갈 길이 끊긴 단절된 장소일 뿐. 책방주인의 한 마디는 이 거리의 현 상황을 상징하는 듯했다.

△아직 그 자리를 지키는 일신서림

꽤 오랫동안 ‘첫째 집’으로 불렸던 일신서림은 옛날 모습으로 남아있다. ‘당기시오’라고 써진 문을 무심코 밀어서 열 때 들리는 그 소리가 여전하고 문 옆에 쌓여있는 철 지난 고등학교 참고서도 그대로다. 찾아오는 손님을 반기는 모든 풍경은 변함이 없지만, 예전 같은 인기척과 호기심은 사라졌다. 대신 한산하고 쓸쓸한 분위기, 그리고 인기척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라디오 소리가 차분함을 남기고 있다.

헌책방이 쇠퇴하고 있지만 일신서림에는 아직 2~3만 권의 서적이 남아있다. 참고서, 소설책, 전공 서적에서부터 관상, 풍수지리서에 이르기까지 손때 묻은 다양한 서적이 세월을 머금으며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다양한 책 중에서도 그럴듯하고 매력있는 책은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중에 하나가 영어원서다.

이곳에서 구하는 영어원서는 여러모로 완벽했다. 새 책을 파는 서점에서는 아예 원서를 취급하지 않거나 혹은 해외 배송료 때문에 구매하기 어려웠지만, 이곳에는 늘 원서가 있었다. 시기를 잘 맞추면 ‘앵무새 죽이기’, ‘시간여행자의 아내’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베스트셀러를 구할 수 있음은 물론 16달러짜리 책을 4000원에, 7달러짜리 책을 2000원에 파는 등 가격도 저렴했다. 그 저렴한 가격에 넘어가 좋은 원사가 보일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책을 사기도 했고 허세가 가득했던 시절에는 ‘나 이정도로 교양 있는 사람이다’는 의미로 책을 사서 책장에 고이 모셔두기도 했다. 물론 읽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찾은 일신서림에 이번에는 ‘해리포터’ 원서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리포터 세트를 생일선물로 받는 때도 있었는데, 다음번에 찾아올 때는 또 누구의 어떤 추억을 보게 될까?

또 다른 양서를 접하는 행복한 상상을 해보지만, 한편으로는 30년째 일신서림을 운영하고 있는 기용석(65) 사장의 한마디가 무겁게만 다가온다. “손님도 옛날만큼 오지 않고 책방을 따로 물려주거나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요. 내가 그만두게 되면 문 닫는 거죠.”

이민욱 전북대신문사 전 사회부장
이민욱 전북대신문사 전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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