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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46. 춘향이의 옥(獄) - 남원 관아 터 복원해 춘향의 옥중가 들을 수 있기를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46. 춘향이의 옥(獄) - 남원 관아 터 복원해 춘향의 옥중가 들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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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2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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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여, 춘향이는 옥방에 홀로 앉아 장탄식으로 울음을 우난디, 춘향 형상 가련하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자리여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비만 와도 임의 생각 추오동엽락시에 잎만 떨어져도 임의 생각...” 《춘향전(春香傳)》중 춘향이가 옥중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이몽룡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대목이다. 세상에서 가장 절절한 사랑가이다. 명창 임방울(1905-1961)과 안숙선 그리고 오정해 · 박애리 · 이윤아에 이르기까지 춘향이의 아픈 마음을 토해내듯 전해줄때면 그 애절함에 절로 마음이 미어진다.

김윤보의 『형정도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통 원형옥
김윤보의 『형정도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통 원형옥

춘향이는 헝클어진 쑥대머리의 형상으로 목에 칼을 쓴 채 옥(獄)에 갇힌 모습으로 안타깝게 앉아있다. 대부분의 드라마 속 영상으로 그려진 옥중 춘향이의 모습이다. 갇힌 독방에는 짚풀이 놓여 있고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옥의 모습이 네모난 공간으로 확장이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옥의 형태는 원형으로 춘향이가 갇혀있던 남원의 옥도 원형옥(圓形獄)이었다.

원형옥은 북부여(기원전 200년쯤)에서 사용됐다고 전해지며 수차례의 왕조가 바뀌는 동안에도 2000년 이상 원형옥의 형태는 그대로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옥은 둥근 모양으로 담장을 쳐 그 안에 옥사를 설치했고, 감옥이 아닌 옥(獄)이라는 용어로 불렸다. 하지만 갑오경장(1894)때 관제를 개혁하면서 기존의 전옥서(典獄署, 고려 초에 설치되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옥에 갇힌 죄수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를 감옥서라 개칭했고 이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1907년 감옥서를 감옥이라고 개칭했다. 이후 감옥이란 명칭을 형무소로 바뀔 때까지 29년간 사용했다. 게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우리나라 전국 읍성과 관아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고유의 원형옥도 함께 훼손돼 지금은 문헌과 그림 그리고 고지도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옥서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중 태조실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전옥서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며, 사리(司吏) 2명이다.” 전옥은 형조의 죄인들을 판결이 있기 전까지 수용하는 옥으로 칸마다 벽 위쪽에는 창살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판자를 깔아 두었으며 문은 두꺼운 판문에 자물쇠를 설치하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대부분 읍성 내 독립된 시설로 존재한 원형옥은 그 모습을 만든 선조들의 사상이 돋보이는 시설이다. 원형인 이유는 감시의 사각을 없애기 위함도 있다지만 사상적인 의미가 더 큰 것으로, 원형의 옥을 축조한 것은 원이 하늘이나 우주를 의미한 것으로 원형 안에 죄인을 수용하면 죄인들이 스스로 교화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지 죄인을 가두는 것이 아닌 다시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는 애민(愛民)사상과 집안 사정을 고려해 죄인의 형을 감하거나 면해 주는 휼형(恤刑)과 연관돼 이어진다. 단순히 죄인을 사회와 격리시키고 형벌만을 가하는 것이 아닌 교화와 재사회화에 중점을 둔 것으로 사람을 위한 형벌제도의 취지가 우리의 원형옥에 깃들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중 언급된 안옥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중 언급된 안옥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이 승하했을 때 남긴 부고에는 “크고 작은 형벌을 애써 삼가서 불쌍하게 할 것을 관리에게 경계하여, 비록 일태일장(一笞一杖)일지라도 모두 조정율문(朝廷律文)에 따라서 하고, 절대로 함부로 억울하게 하는 것을 금하여, 교령(敎令)에 기재하여 나라 안에 반포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 항상 경계하여 살피기를 더하게 하기를, 안옥(犴獄)에 이르기까지 하고, 도면을 그려서 안팎에 보여 그림에 따라 집을 짓게 하되, 추운 곳과 더운 곳을 다르게 하였으며, 구휼하기를 심히 완비하게 하여, 횡액에 걸려 여위고 병든 자가 없게 하였다.”란 내용의 업적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세종은 재위 8년(1426)에 만든 옥의 표준설계도인 ‘안옥도(犴獄圖)’에 옥을 지을 때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지반을 한자(30㎝) 이상 높여 짓도록 했다. 또 옥사를 남향으로 짓고, 옥담 위의 처마를 길게 빼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 온도를 낮출 수 있도록 했다. 계절의 특성을 고려하여 옥을 지을 때 죄인이 병들거나 죽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려 하였고 죄의 과중에 따라 나누며 또한 남녀를 구분하여 ‘남옥’과 ‘여옥’으로 분리해 수용하였다. 1595년 서양의 네델란드에서 처음으로 남녀감옥의 분리가 실시되었다고 하니 조선이 서양보다 1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애민사상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애민사상

이렇듯 원형옥은 선조들의 애민사상이 담겨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에서는 옥을 맡은 아전과 군졸들이 죄수를 괴롭히지 못하게 엄하게 다스리라고 명한 부분이 있다. “안옥(犴獄)은 원통하고 억울하게 되기 쉬우므로 중외의 옥을 맡은 관리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안옥을 설치한 것은 본래 죄 있는 사람을 징계하자는 것이고 사람을 죽게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 번 교조(敎條)를 내려서 힘써 긍휼하게 하였는데, 옥을 맡은 아전과 군졸들이 법도 아닌 것으로 죄수를 괴롭히고 침노하니, 이제부터는 갇힌 사람의 친속을 시켜서 하소연하게 하며 엄하게 다스려서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펴게 하라.” 하였다. 하지만 선조들의 사상이 깃든 원형옥은 일제에 의해 해체돼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전라도무장현도』 부분도
『전라도 무장현도』 부분도

 

『용성지』내 남원관부도 부분도(1699년)
『용성지』내 남원관부도 부분도(1699년)

다행히 최근에 각 지자체마다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과 관아의 터를 복원하여 지역의 자산으로 만들어가는 추세이다. 바라건대 원형옥의 모습도 복원되어 당대의 사상과 이야기들도 함께 체험 할 수 있으면 한다. 사유지이거나 복원이 어려울 경우 관련 안내판이라도 해당 장소에 올곧이 세워야 할 것이다. 특별히 춘향이의 이야기가 담긴 남원에는 지역의 명창이 건네주는 춘향이의 옥중가를 그곳에서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깊은 가을 춘향이의 애절한 사랑노래를 들어보며 그 흔적을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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