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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몽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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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승인 2018.11.2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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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므로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의 내용이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수많은 약자가 상대적 강자에게 폭력을 당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다. 놀랍게도 뉴스를 본 사람들은 왜 맞았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혹자는 맞을 만한 짓을 한 것 아니냐고, 폭력에 대한 원인을 제공했으니 맞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도대체 그럴만한 짓이 무엇이기에 맞을 만한 짓이 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이 ‘맞을 짓’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것은 학교였을 것이다.

얼마 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청소년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이유는 아이들이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어서라고, 체벌이 부활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체벌하지 않은 역사보다 체벌한 역사가 훨씬 길다. 고로 체벌로 교육을 받고 자라온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뒤죽박죽 엉켜있는 셈이다. 같은 나이의 사람들, 같은 시기에 학교와 사회 안에 사는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 비슷한 나이더라도 누구는 맞고 자랐고, 누구는 맞지 않고 자랐다. 그런데 또 누군가는 여전히 다시 때려야 한다고 외친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낭설이 정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리면 말을 잘 듣는다. 한국은 무엇이든 때려야 된다. 젊은 세대조차 우스갯소리로 작동이 되질 않는 기계를 두드리며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체벌에 관해 이상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과연 ‘맞을 짓’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맞을 짓’을 도표화할 수 있을까? 그럼 그것을 도표화하고 그 수준에 맞게 어떻게 맞을 것인지 체벌 수위를 정하고 그것에 순응하면 되는 일일까. 그 모든 순서를 상상해보면 이만한 지옥도가 없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맞는 사람의 입장은 거의 고려되지 않을 것이다. 소위 ‘맞을 짓’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힘과 권력에서 앞선 사람들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선생이 학생에게, 상사가 부하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당장 맞아서 해결되는 것은 면피용 반성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폭력을 통해 문제가 소강상태에 접어든다면, 때리는 사람은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맞는 사람은 다르다. 이 눈만 피한다면 그만이다. 구체적으로 내 실수나 잘못에 관해 어떤 부분을 시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생략된다. 직접적 경험을 통해 학습할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저 다음번에 맞지 않기 위한 행동을 할 뿐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은 자신보다 약자를 만났을 때 그런 기회를 제공할 것인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흔히 듣는 “우리 땐 다 그러고 자랐어. 나? 잘 자랐잖아.” 폭력은 계속해서 그럴듯한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다시 인권 선언문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존엄을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이 명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나도 남의 존엄을 존중해야 한다. 억압과 폭력을 통해 지켜지는 존엄 같은 건 없다. 누군가에게 허용되는 폭력이나 체벌의 방향은 언제나 나를 향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의 존엄을 지켜야 내 존엄도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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