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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 엄철호
  • 승인 2019.01.14 1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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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철호 익산본부장
엄철호 익산본부장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지난 1997년에 개봉한 할리우드 공포영화 제목이다.

10대의 음주운전으로 시작된 사건이 모르쇠 변명으로 진실을 덮어버리지만, 1년 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적힌 편지가 날아오면서 관련 인물들이 하나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이 영화는 수많은 패러디의 소재로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변명 아닌 변명들은 2019년 현재에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반복되고 있는 우리의 일상이기도 하다.

최근 익산시 공직사회가 시끄럽다.

익산시청 간부 공무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고소한 여성 직원들에게 또다른 간부 공무원들이 합의를 종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특히 합의를 종용한 간부 가운데는 인사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간부부터 피해 직원들과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는 부서장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장이 일파만파 확산 추세다.

급기야 익산시청 여성 공무원 모임인 백목련회가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 해당 간부들을 강력 비판하며 적극적인 대응 방안 모색을 밝히고 나섰다.

백목련회는 “간부 공무원이 합의하라고 했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고,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간부 공무원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며 앞으로의 강력 대응을 시사했다. 성추행 피해를 입은 여성 직원들이 또다른 상사의 눈치까지 봐야하는 등 심적 부담에 따른 2차 피해를 우려한 발빠른 행동으로 일단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백목련회에게 정말 묻고 싶은게 있다.

여성 공무원 성추행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간 어떤 행동을 했는가. ‘나는 백목련회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비아냥이 공직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기에 하는 질문이다.

사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끔찍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 그간의 삶이 갈가리 찢기고, 생활의 모든 것이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나면서 심지어 ‘꽃뱀’이라는 꼬리표까지 붙는 2차 가해까지 견뎌내야 한다.

무고와 명예훼손 압박은 그저 양념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사법체계가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최후의 보루로 폭로를 택하게 된다. 그들에게 허용된 마지막 싸움터인 셈이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폭로하기 위해 지난해 JTBC 뉴스룸에 나온 비서 김지은 씨의 사건을 한번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 그녀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뉴스룸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김 씨가 뉴스룸에 나오기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직장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묵살’됐다. 김씨를 구제할 시스템은 그곳에선 작동하지 않았다. 전국 뉴스를 통해 얼굴과 실명까지 공개한 그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처벌하고 막는데 실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이번 익산시청 사태도 김 씨의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백목련회는 같은 여성 공무원으로서 피해 직원들을 위한 성추행 규탄 성명서 요구를 번번이 묵살했다. 무슨 의도가 있는 것처럼 오히려 2차 가해 소문만 확산됐다.

그런 백목련회가 뒤늦은 강력 대응을 시사하며 이제서야 나서겠다고 한다.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고 부끄러운 민낯이 아닐 수 없지만 피해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하루빨리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가져주길 간곡히 당부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발 눈을 감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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