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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1. 과거 시험의 풍경과 향교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1. 과거 시험의 풍경과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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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2.2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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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과응시(小科應試)', 작가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jpg
'소과응시(小科應試)', 작가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jpg

최근 ‘스카이 캐슬’이란 드라마가 화제였다. 그 흥행의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인 입시문제를 다룬 점에 있다. 입시나 교육열에 관한 것은 과거제도 하에 시험을 치르며 선조들도 겪었던 문제로 예나 지금이나 관심의 대상이다. 과거급제야말로 출세의 길이라 여기며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했을 모습과 좋은 학교와 스승으로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제자로 들어가 노력했던 것은 드라마 속의 내용과 다른 듯 닮아있다.

조선 시대의 그림 <소과응시(小科應試)>와 김홍도의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란 작품에는 과거 시험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김홍도의 그림은 과거 시험을 치르기 직전 새벽부터 모여든 풍경을 그린 것이다. 스승 강세황이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 치르는 열기가 무르익어, 어떤 이는 종이를 펼쳐 붓을 휘두르며, 어떤 이는 서로 만나 짝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이는 행담에 기대어 피곤하여 졸고 있는데 등촉은 눈부시게 빛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반평생 넘게 이러한 곤란함을 겪어본 자가 이 그림을 대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질 것이다”란 글을 더했는데 이를 통해서도 응시생의 어려움을 가늠해보고 과거 시험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와 '한양가'.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와 '한양가'.

과거 시험장은 자리 선점이 중요한 것으로, 전날 밤에 시험장의 문이 열리면 ‘선접군(先接軍)’이라는 재빠르고 힘센 사람을 앞세워 좋은 자리를 다투어 선점했다. 그 모습은 조선 풍물 가사인 <한양가>에 “건장한 선접군이...각색 글자표를 하여 등(燈)을 보고 모여 섰다 / 밤중에 문을 여니 각색 등이 들어 온다 / 줄불이 펼쳤는 듯 새벽 별이 흐르는 듯 기세는 백전(白戰)일세 빠르기도 살 같도다”라는 대목으로 나온다. 그림에서 보이듯이 큰 양산인 ‘일산(日傘)’을 천막처럼 펴고 응시생을 중심으로 선접군과 시험을 도와주는 사람들과 심부름을 하는 노비가 접(接)이라는 한 팀이 되어 자리를 잡는다. 워낙 많은 응시생이 몰리는지라 시험문제를 빨리 보고 제출하는 응시생들이 합격에 유리했다. 그 때문에 자리다툼이 심해 무질서했고 사람들이 몰려 8명이 압사했다는 숙종 때 기록도 전해진다. 흔히들 엉망진창 뒤죽박죽일 때 ‘난장판’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뒤엉켜 싸움판이 벌어지고 더러는 부정행위도 했던 ‘난리 속의 과거 시험장’에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결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대략 30세이고 최연소 합격생은 13세, 최고령 합격생은 85세였다. 늦은 나이라도 뜻한 바를 이루고자 평생을 바쳐 과거 시험에 매달려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춘향전>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다. 과거를 보기 위해 춘향이와 남원 오리정(五里停)에서 애달프게 이별하고 한양으로 가 장원 급제를 한 이몽룡이 춘향이를 다시 만나는 내용에서도 당시 과거제도에 대한 경쟁과 시험 합격 후 갖는 위력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과 가문은 그야말로 고을의 자랑이었다. 순창 구미마을 남원양씨 종중에서 600년 동안 보관해오다 국립전주박물관에 기탁한 과거 합격증 ‘홍패’는 보물 제725호 이다. 고려 공민왕 4년(1355) 양이시가 과거에 합격해서 받은 홍패와 아들 양수생이 우왕 2년(1376년)에 받은 홍패로 다른 합격증과 교지 5매로 구성된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에 포함되어 있다. 두 장의 홍패가 보물이 된 이유는 ‘교지’라 쓰인 조선 시대 합격증서와 달리 ‘왕명’이라 기록되었고 고려왕의 ‘어보’가 찍힌 점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 합격증을 받기까지 주경야독하며 공부했을 선조들의 총총한 눈매와 글을 읽는 낭랑한 음성까지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 중 보물 제725호 홍패.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 중 보물 제725호 홍패.

선조들이 공부했던 학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 고등교육 기관이었던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으로 4학(四學)과 지방향교가 관학으로 있었고, 사립 중등교육 기관인 서원과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서당이 있었다. 향교의 학생을 교생이라고 칭했는데 재학하는 동안 국역이 면제되는 특권을 지녔다. 교생은 각 군현에 따라 정원이 달랐으며 일정 교육을 받게 되면 초시(初試)인 생원·진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합격 후엔 성균관 입학을 허용했으며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왕의 방문이 있을 시에 특별하게 치른 지역균형 선발제 격인 ‘외방별시’가 있었는데 우리 지역엔 ‘전주별시’가 있었다. 특정 지역민을 위한 응시이다 보니 해당 지역에 일정기간 거주를 하고 향교나 서원에 적을 두어야 응시할 수 있었다.

지방 인재양성의 요람인 향교는 교육공간과 배향공간으로 구성되어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교육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 향교는 지역의 백성을 교화하고 유학의 소양을 지닌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세종 시기 지리지를 살펴보면 당시 329개의 향교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1407년 장수에 창건되어 본 모습이 잘 남겨진 ‘장수향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향교는 임진왜란 등 풍파를 겪으며 훼손된 것을 조선 후기에 중건했다. 이후 갑오개혁(1894년) 때 학제 개편을 하며 교육을 기능을 상실했고, 현재 서울에는 성균관과 양천향교 1개, 전북 26개, 전남 28개, 경북 40개 등 남한에서만 234개의 향교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때부터 이어온 우리 지역의 향교로는 고려 공민왕 때 ‘학당사’였다가 1512년에 개명한 ‘고창향교’와 고려 말 건립된 익산의 ‘용안향교’와 정읍의 ‘고부향교’ 그리고 전라도의 수도향교로 칭해진 ‘전주향교’가 있다. 전주향교는 초기 경기전 근처에 건립되었다. 그러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는 경기전이 세워졌는데 향교로부터 들리는 교생들의 소리가 소란하다 하여 1401년 전주성 서쪽에 향교를 이건 하였다가 1603년 현 위치인 완산구 교동에 자리 잡고 중수와 보수를 거듭했다.

향교의 주요공간인 명륜당의 ‘명륜(明倫)’은 『맹자』의 등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에서 유래했다. 지역사회를 밝혔던 향교는 교육기관으로 사회 교화의 기능은 물론, 지역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건축학적으로도 품은 가치가 높다. 입학과 새 학기가 다가오는 즈음 겨울의 정취가 어우러지는 향교를 찾아 그 가치를 살펴보고 선조들이 배움에 열과 성을 다했던 공간에서 힘을 받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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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이 2019-02-22 09:07:32
조선시대의 sky캐슬이라니 ㅋㅋ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