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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전위예술 이끌어온 이건용 교수 "시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이해하려는 욕구, 예술로 승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전위예술 이끌어온 이건용 교수 "시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이해하려는 욕구, 예술로 승화"
  • 김은정
  • 승인 2019.02.28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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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예술가 이건용 전 군산대 교수(77)가 작업실에서 캔버스를 벗어난 행위예술을 하고 있다.
전위예술가 이건용 전 군산대 교수(77)가 작업실에서 캔버스를 벗어난 행위예술을 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 즈음이다. 국내외 미술계의 뜨거운 관심을 그야말로 격렬하게 받기 시작한 작가가 있다. 언뜻 생각하면 어느 날 새롭게 등장한 청년작가인가 싶겠지만 그는 청년도 중견도 아닌, 원로의 반열에 선 70대 작가다. 전위예술가 이건용 전 군산대교수(77).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로 기획된 개인전 ‘달팽이 걸음’전 이후 불붙은 그의 활동은 국내외 갤러리를 이어가며 더 열정적이고 새롭게 미술 언어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중고등학교까지 줄곧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고, 대학에서도 미술을 전공했으며 60년대부터 한국현대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줄곧 주도해온 그가 마치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인양 국제적인 미술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해외 갤러리들을 열광케 하는 이 새삼스러운 흐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를 만났다. 4~5년째 이어지는 이 특별한 환경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다.

작업이 더 새롭게 변했을까.

“그럴 일은 없어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작업은 70년대 초반부터 줄곧 해온 것들이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거든요. 다만 이런 이유가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이를테면, 내 작업이 지향하는 개념적인 선명성인데, 미술을 어떤 분위기나 또 다른 무엇이나 잘 알 수 없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방법론, 그것도 복잡하지 않고 선명한 시스템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점과 관계없이 소통이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고 보니 개념의 선명성은 작업에서 뿐 아니라 그의 일상과 삶의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늘 그랬듯이 그는 인간적인 면모와 유머 넘치는 대화로 인터뷰 내내 웃음을 안겼다. 따뜻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화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움과 견고한 자기 확신의 경계 사이에서 더 빛나는 듯 했다.

인터뷰는 군산시 개정면 아산리에 있는 작업실에서 있었다. 그 작업실 문에는 직접 써놓은 글귀가 있다. ‘상황은 해석하라는 신호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견고한 규범과 제도적 장치에 맞서 자기만의 해석으로 시대를 읽고 문제를 제기해온 그의 언어가 무디어지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업실 공간이 큽니다. 천정도 꽤 높은데요. 이곳에서 줄곧 작업을 해오셨나요.

“91년엔가 학교에 있을 때 마련했어요. 마땅한 작업실이 없어 큰 작품을 할 때는 학교 복도를 이용했거든요. 언젠가 친분이 있던 갤러리 대표가 왔었는데 복도에 놓인 작품을 보고 놀라는 거예요. 그때 작업실을 들일만한 공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때 만난 공간이 양어양식장이었던 이 작업실입니다.”

-그동안의 작업이 다 이곳에 와있습니까.

“그렇죠.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다 있어요.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도 100여점 되는데 여기도 꽉 찼어요. 그만큼 작품이 안 팔렸다는 증거겠죠.(웃음)”

-요즘은 미술시장에서 교수님 작품을 주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은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난 이후 작품이 꽤 팔려나갑니다. 물론 지금 여러 곳의 화랑에 나가 있는 작품은 위탁한 작품이지만, 근래 들어 제 작업에 쏟아지는 국내외 화랑들의 관심이 저 또한 새롭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하자면 사실 우리나라 화랑은 역할이 애매합니다. 미술시장에서 화랑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지요. 외국의 화랑들은 대개 주목하는 작가를 먼저 키웁니다. 투자를 하면서 그 작가를 성장시킨 다음에 결실(?)을 거두는 형식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풍토를 아직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날 눈에 띄는 작가를 끌어들이는 식이죠. 현실을 보자면 작가와 화랑의 작품 값 배분도 매우 불균형합니다.”

-어찌됐든 교수님 작품이 활발하게 판매된다는 사실이 반갑습니다.

“살다보면 삶의 환경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가 바로 그 계기인 것 같아요.”

-그 전시는 교수님의 작업을 총정리 하는 의미가 있었죠.

“그렇죠. 1979년 처음 발표한 이후 대표작이 된 <달팽이 걸음>이 전시 주제였어요. 달팽이 걸음은 ‘빨리 빨리’를 내세우는 현대문명의 속도에 맞서는 언어예요. 느리지만 그렇게 살아남는 생명력을 표현하는 퍼포먼스지요. 메시지가 강해서 아마도 많은 관객들이 더 호감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설치작품과 드로잉 작품의 거개가 다 보였던 그 전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 매체들의 보도도 폭발적이었어요.

“한국의 현대미술사를 정리하는 기획전이었는데 제 전시는 시대의 주류와 관계없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을 이끌었던 작업을 한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감사한 일이지요.”

-작업을 정리하는 의미의 전시지만 새롭게 보인 작업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어요. 사실 저는 미술사적으로 회고하고 정리하는 전시의 취지를 제대로 살려내고 싶었습니다. 공간도 미술관 전관을 활용하고 싶었고, 기간도 1년은 할 수 있기를 바랐고요. 그런데 미술관측에서 공간을 어떻게 채우려고 하느냐에 대한 우려가 컸어요. 당초 구상했던 ‘의자프로젝트’가 그러한 우려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퍼포먼스였는데 결국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의자프로젝트’는 그 후 대구 전시에서 보였던 프로젝트 아닌가요. 퍼포먼스의 취지가 궁금합니다.

“맞습니다. 2015년 대구 전시에서 화제를 모았던 그 작품이죠. 의자프로젝트는 관객들과의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하는 작업입니다. ‘의자’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대상이잖아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쓰고 있는 ‘의자’를 전시장으로 들여오고 설치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관객들이 그 의자에 앉아 영상을 감상하는 퍼포먼스가 기본 골격인데,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기획은 그 의자를 일정한 시간에 한꺼번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의자를 더해지게 하는 방식이었어요.”

-관객과의 예술적 커뮤니케이션 성과는 어땠습니까.

“대구 초대전이 있었던 미술관은 구청에서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전시장 시설은 괜찮았는데, 큐레이터에게 전시장에 관객들이 많이 찾아 오냐고 물었더니 아주 적다는 거예요. 그때 의자프로젝트를 여기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공간에서는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절실하니까요. 근처에 있는 음식점, 가게, 사무실 등을 찾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하고 의자를 빌렸어요.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의자를 주겠다는 분들이 너무 많아져 전시장을 가득 채웠지요. 오프닝 때는 관객들이 몰려 퍼포먼스 공간이 비좁을 정도였어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통로로 왜 굳이 ‘의자’를 선택하셨습니까.

“의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도구입니다. 한편으로는 ‘권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저는 의자가 지닌 다층적인 의미 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지점을 보았습니다. ‘내 의자를 너에게 빌려주겠다’는 것의 의미는 특별합니다. 내 권한과 권리를 빌려주겠다는 것도 되고 내 편리함을 빌려주겠다는 것도 되고…….”

-교수님 작업의 근간은 행위예술로 대변되는데 행위예술은 유형으로 남아 있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교수님의 대부분 전시는 행위예술로만 끝나지 않고 유형의 작품들로 오랜 시간 동안 관객과 소통합니다.

“행위예술이 본류에 있지만 설치작품 종류가 워낙 많습니다. 드로잉 등 회화 작품도 많고요. ‘신체드로잉’ 처럼 퍼포먼스로 드로잉 작품을 이어내는 작업도 있지요. 행위예술로만 그치지 않는 다양한 작업이 가져온 결과일겁니다.”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행위예술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일찍부터 몸에 대한 관심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신체에 대해 철학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내가 다닌 배재고등학교는 1학년 때부터 필수로 들어야 하는 논리학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철학 이론에 취미를 갖게 되었어요. 마침 고 1때 논리학 선생님이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분인데 수업 시간 짬짬이 2차 대전 이후의 현대철학에 대해서 강의를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골치아파했는데 나는 정말 좋았어요. 그때 언어분석 철학 같은 이론도 공부하고 비트겐슈타인이나 촘스키 같은 학자들도 알게 되었어요.”

-교수님의 예술적 언어가 논리적인 선명성을 갖게 된 바탕을 알겠습니다. 그런 학문적 관심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아마도 아버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회자이자 교육자였던 아버님은 조금만 여력이 생겨도 책을 먼저 사셨어요. 어린 시절 집에 쌓아놓은 책이 만권 정도 되었는데 방 네 개 중 두 개가 책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늘 책을 옆에 끼고 살았던 아버님 덕분에 우리 형제들도 책을 많이 읽었죠.”

-미술은 취미가 있었습니까.

“외삼촌이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다고 직접 배운 것은 아니고, 인간 활동 중에 그림 그리는 일이 있다는 것을 삼촌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미술반에서 활동했으니 스스로 즐기는 취미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중학교 때는 미술교과서로만 충족되지 않는 정보에 대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미국 문화원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면서 그 욕구를 채웠죠. 팝아트도 그 시절에 만났는데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부모님도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보셨던 모양이군요.

“초등학교 때부터 여기저기 미술대회를 많이 나갔었는데 제법 많은 상을 탔어요. 월요일은 부모님께 상장 가져다 드리는 날이었죠. 그러나 직업을 그림 그리는 일로 삼는 것은 반대하셨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예술고를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야 가난한 사람도 돕고 아픈 사람도 치료해 줄 수 있다고……. 그러나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진 않으셨어요.”

-본격적으로는 언제부터 작품 발표활동을 하신 겁니까.

“70년대 초반입니다. 그때 ST(Space and Time 미술학회)를 창립하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신체향’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도 그 즈음이에요.”

-ST나 AG는 당대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흐름을 주도했던 그룹인데 이러한 작업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는 무관했었나요.

“그럴리 없지요. 현대미술의 실존적인 조건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업은 결국 주류에 대한 반항, 기존 질서를 거스르는 도발적 행위나 설치로 이어지거든요. ‘71년 경복궁에서 열린 한국미술협회전에 ’신체향‘도 설치미술에 대한 이해가 워낙 부족했던 때이기도 했지만 수도경비사에서 나와 철수를 강요할 정도로 이슈가 됐었어요. 예술가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 상황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예술로서 이해받지 못하는 불행한 시대였죠.”

-전위예술의 시작이랄 수 있는 ‘신체향’은 어떤 작품인가요.

“나무를 뿌리째 상자에 넣어 옮겨 놓는 작품인데 기존의 전시장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된 작업입니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관객들은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은 자연의 일부를 전시장에 옮겨놓는 행위를 통해 전시장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작품이란 무엇인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이죠.”

-작업에 따라서는 정치적 발언으로도 읽혀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물론이죠. 예술은 시대를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작년 북경 전시 때도 저지당해 못 가져간 대작이 몇 점 있습니다. 정치성을 반영한 작품들이죠.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시대적 환경을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요즈음은 포장박스나 한번 사용되고 나면 폐기되는 공공기관의 공문이나 엽서 봉투 등을 활용해 작은 드로잉을 남깁니다. 한 시대를 남기는 가장 선명한 흔적이 아닐까 싶어요.“

-교수님이 궁극적으로 찾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궁금해집니다. “나의 행위는 예술가로서 당대를 절실하게 사는 한 방식이에요.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죠. 삶의 과정은 당대를 함께 호흡하면서 그 안에서 절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술 작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내 작업을 뒤돌아보면 모두 시대적으로 호흡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 작업은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웃음 터지게 하는 화법으로 상대방을 무장해제(?)시켰다. 기존의 질서를 비틀고 뒤집어 새로운 질서를 제시해온 그의 50년 예술 행위의 양적 생산은 잠시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놀라웠으나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바탕에 숨 쉬고 있는 개념의 선명성과 논리적 근거였다.

철학적 논리와 개념을 동반한 예술 행위로 관객들과 소통해온 그의 언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 선명한 궤적을 남기며 시대를 건너왔다. 그 흔적이 새삼 더 빛나게 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다시 들여다보니 거기, 그의 충만한 지적 사유의 결실이 있었다.

■ 이건용 교수는

- 캔버스 벗어난 행위예술, 해외서도 '주목'

한국 전위예술의 문을 열고 이끌며 발전시켜온 이건용 교수는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남한으로 온 것은 해방 직전. 목회자이자 교육자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6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언제나 ‘바른 생활’ 할 것을 가르쳤다. 가난했으나 청빈했던 아버지는 책읽기를 즐겼다. 그 덕분에 책속에 파묻혀 지냈으나 가뜩이나 비좁았던 집은 늘어나는 책으로 더 비좁아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던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경직된 집안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워 가출을 했다. 휴지를 줍는 넝마주이들과 함께 지내다 개학을 앞두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그의 옷을 벗기고 소독약부터 뿌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분석철학 현상학 등 같은 또래들이 눈을 돌리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는 관련된 학회를 쫓아다니며 강의를 듣고 토론에 참여했다. 그때 쌓은 공력은 그의 예술세계 기저를 형성하는 바탕이 됐다.

부모님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어머니를 설득해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국전에 출품, 입선을 하기도 했지만 공모전 출품은 그것으로 그쳤다. 기존의 질서 대신 새롭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예술 언어를 표현하기 시작한 그는 ST(Space and Time 미술학회)를 창립하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그룹에 참여하면서 캔버스를 벗어난 행위예술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한국 전위예술의 기수가 된 그는 신체를 활용한 다양한 퍼포먼스를 발표하기 시작, <건빵 먹기> <장소의 논리> <신체드로잉> <달팽이 걸음>등 시대를 해석하고 소통하는 언어로 관객들과 만났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된 그는 설치미술 작품 <신체항>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79년에는 지명공모로 참여했던 리스본국제미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를 2014년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에 초대해 개인전을 열었다. 그 전시를 보게 된 해외의 미술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이 한국의 ’이건용‘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국내에서도 그의 작업과 작품에 더 새롭고 특별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화제를 모았던 지난해 북경의 화랑 페이스 초대전도 그 연상에서 이뤄진 것이다.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출발한 그의 작업은 50여 년 동안 신체와 다양한 매체의 조화를 통해 특별한 회화 언어를 만들어내면서 한국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혔다.

퇴직 이후 더욱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그는 올해도 부산시립미술관과 서울 페이스, 대구 리안미술관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다.

목원대를 거쳐 81년 군산대 교수로 직장을 옮기면서 군산 사람이 된 그는 퇴직 후 전업 작가로 살면서 더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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