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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인과 대청인
대변인과 대청인
  • 위병기
  • 승인 2019.03.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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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에서 가덕도를 향해 달리다보면 거가대교가 나온다. 마치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로터널처럼 거가대교는 바다 아래 터널을 지난다. 그런데 거제에서 가덕도를 가다보면 거가대교에 이르기전 오른편으로 작은 마을 하나가 있다. 거제도에 있는 장목면 대계마을인데 지형이 닭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곳은 제 14대 김영삼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내듯 민주화를 일궈내는데 큰 공헌을 한 YS는 대통령 재임중 국가 살림을 거덜내 IMF의 치욕을 겪은 바 있다. 그가 남긴 어록 중 대표적인게 대도무문(大道無門·정도를 걸으면 걸릴 것이 없다는 뜻)이다. 거제 생가에 이 문구가 가장 크게 걸려있다. 그가 즐겨쓴 또다른 어록 하나는 “대변인(代辯人)은 있어도 대청인(代聽人)은 없다”는 말이었다. 나를 대신해서 입장과 처지를 잘 전달해줄 수 있는 대변인은 있을지언정 대신 들어줄 수 있는 대청인은 없다는 의미다. 아닌게 아니라, 양의 동서와 시대의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서 최고봉의 자리에 오른 이를 위해 대신 말해줄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나 대신 들어주는 대청인은 없었다. 그래서 YS도 50년 정치역정을 보내면서 듣기 싫은 거북한 말을 들으려고 나름 애썼으나 막상 대통령이 된 뒤에는 귀가 막히게 되고 결국 소통령의 농단이나 IMF의 치욕을 경험한다.

사실 YS가 정치적으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당 대변인과 원내총무를 지내면서 언론과 국민의 주목을 받은 거였다. 정치초년 시절 낙선을 거듭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민주당과 민중당에서 대변인을 거치면서 빼어난 언변과 정곡을 찌르는 혜안을 인정받으면서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처럼 대변인은 중요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대청인은 없다는 거다.

그래서 권력이 세질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고 잘 들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갑자기 대변인·대청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며칠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하면서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비판하다가 너무 나가면서 “일국의 대통령에 대해 할말, 안할 말을 가려서 해야하지 않느냐”는 반격에 직면한 바 있다. 대변인 경력을 지녔기에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은 더욱 세련미가 부족한듯 하다. 그런데 도내 관공서에 대변인은 차고 넘치는데 이젠 대청인도 필요해 보인다. 자사고 문제와 관련해서 1000명이 넘는 이해 관계인이 교육감을 찾았으나 듣기 싫어서인지 연가를 내고 자리를 비운 김승환 교육감을 대신해 들어줄 대청인(代聽人) 말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대변인 뿐 아니라 대청인도 필요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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