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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3. 단종비 정순왕후의 애사(哀史)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3. 단종비 정순왕후의 애사(哀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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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2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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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칠보면 정순왕후 태생지
정읍 칠보면 정순왕후 태생지

우화루(雨花樓), 부처가 설법할 때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의미를 담은 불가의 공간이다. 서울에 있는 청룡사 우화루는 단종(1441-1457년)이 유배 가기 전날 정순왕후(1440-1521년)와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로 헤어짐을 슬퍼하는 그들의 눈물이 비처럼 흐른 곳이다. 그런 이유로 ‘영원히 이별을 나눈 집’이라 하여 우화루를 “영리정”이라고도 부르고,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는 영월로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헤어져 다시는 못 만나 ‘영영 이별한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비운의 사연을 지닌 조선의 6대 왕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는 세종 22년 태인현(현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서 태어났다. 대부분 세자의 빈으로 추대되어 남편이 즉위하게 되면 왕비가 되지만,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상 왕과 혼인 한 왕비로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유일하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는(본관 여산(礪山)) 풍저창(豊㶆創, 궁중에 상납하는 곡물을 취급하는 관서)의 부사로 종 6품이었다. 정읍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 왕비가 된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남편인 단종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숙부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도 모자라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 또한 부인으로 강등되며 궁에서 쫓겨나 18세에 단종과 헤어져 역사의 뒤안에서 피눈물을 삼켰지만, 단종보다 64년을,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며 82세까지 장수했다. 그녀의 고향인 정읍과 궁에서 나와 생을 마칠 때까지 지냈던 서울, 그리고 단종의 능이 있는 영월과 남양주 사릉에는 정순왕후의 한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단종의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
단종의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

그 비운의 삶은 수양대군이 1453년 김종서를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과 여러 대신을 죽인 ‘계유정난’으로부터 시작된다. 병약했던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왕위에 오른 어린 왕 단종이 겪은 두려움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그 수난의 역사 속에 이듬해인 1454년 왕비로 간택된 송씨가 실제 왕비였던 기간은 고작 1년 6개월이었다. 송씨가 왕비가 되기까지에는, 아버지 송현수와 친분이 있는 수양대군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수양대군의 편에 있던 영응대군(세종의 8번째 왕자)의 부인이 송현수의 누이이고, 송현수의 처 민소생의 자매인 민대생의 딸은 권세가인 한명회의 부인이었다. 당시 14살의 어린 나이였던 단종의 혼인은 문종의 상중이라 반대가 있었지만,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심 하에 자신을 위협하지 않을 송현수의 딸인 송씨를 단종의 비로 간택한다. 

수양대군은 이후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나서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된다.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난 세조 2년(1456년)의 『조선왕조실록』에 “임금 세조가 송현수에게 술을 부어 올리게 하고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내 굳게 고집하여 듣지 아니한 것은 경이 나의 옛 친구인 까닭이다”라는 기록을 보아 세조가 불러일으킨 피바람 속에 사육신과 관련자들을 죽였지만, 친분이 있는 송현수의 목숨을 구해준다. 하지만, 불안한 세조는 이듬해에 영월에 있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송현수도 결국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유배를 가면서 18세에 홀로된 정순왕후는 궁에서 나와 정업원(淨業院, 현 청룡사)에서 지냈다.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 밤마다 잠을 청하니 잠은 이룰 수 없고 /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시구지만 그리움이 사무쳐 한이 된 정순왕후의 마음도 평생 매한가지였다.

자식이 없는 정순왕후는 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를 시양자로 삼았지만 정미수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 이씨에게 자신의 뒤를 부탁한다. “밤낮으로 슬퍼하여 울고 있던”이라며 자신을 표현한 정순왕후는 82세(중종 16, 1521년)로 한 많은 삶을 마쳤고 해주 정씨의 묘역이 있는 남양주에 모셔졌다. 그런 까닭에 매년 양력 5월 20일이면 전주 이씨, 여산 송씨, 해주 정씨의 세 문중이 모여 정순왕후에게 제를 지낸다. 숙종은 1698년 정순왕후를 복위시키며 단종을 평생 생각하고 그리워했다는 의미로 정순왕후의 묘에 사능(思陵)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사릉참봉의 벼슬을 한 서유영은 “아! 왕비는 어린 나이에 불문에 몸을 의탁하여 한을 품고 고통을 인내하며 여생을 마쳤다”며 『금계필담(1873년)』에 탄식을 하고는 능침을 배알할 때마다 목이 메인다고 했다. “사릉의 꽃과 나무, 선봉(仙封)을 지켜주고/ 소쩍새 소리마다 원망이 서려있네 / 정업원 동편에 있는 세 길 넘은 바위는 / 지금도 영월의 봉우리를 바라보네”라는 문구로 슬픈 역사로 남은 정순왕후의 넋을 달랬다. 

 

서울에 남은 
서울에 남은 정순왕후의 흔적

숙종의 주도 아래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킨 데 이어 영조는 친히 사릉을 찾아가 예를 마치고 정순왕후의 흔적을 찾아 정업원의 옛터에 “정업원구기”라는 비석을 세우고 유적지에 친필을 남겼으며, 정조도 단종에 관한 과거사 재정립을 하고 관련 유적을 정비하며 기록을 남겼다. 특히나 영조가 정순왕후에 극진한 예를 갖춘 데에는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과 정순왕후가 같은 동향인 정읍 출신인 까닭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읍 시산리 동편마을에는 정순왕후의 태생지 안내판이 증조할아버지인 ‘송계생의 유허비각’과 노태우 대통령 때 새긴 ‘정순왕후여산송씨태생지비’가 함께 있다. 정순왕후가 궁을 나와 머물던 현 종로구 일대에는 단종이 있는 영월인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는 동망봉을 비롯하여 자주동천과 여인시장이 있던 장소들이 유적으로 있고, 영월에는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며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과 장릉이 있다.

그 한을 달래려 1999년에 사릉에서 자란 소나무를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하였지만, 합장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각자 잠든 능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나라의 자랑이 되었지만 그들의 한은 어찌할까. 봉분을 이불처럼 감싸고 있는 떼라도 서로에게 보내주어 그리운 마음을 보듬게 하면 좋겠다. 또한, 정읍의 정순왕후 태생지도 인근 태산 선비문화와 연계하여 왕가의 여인 정순왕후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는 의미 있는 유적지로 보완해 지역의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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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주 2019-04-01 00:34:23
정순왕후가 우리고장 출힌인 줄을 이제야 소상히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왕을 탈환키 위한 여러난을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스컬리 2019-03-25 15:33:46
정순왕후의 고향이 우리 지역인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슬픈 사연이 있는 지도 몰랐네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기사 내 내용처럼 합장은 못해도 떼를 나누게 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