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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5. 치명자산에 깃든 환한 빛, 지정환 신부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5. 치명자산에 깃든 환한 빛, 지정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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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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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자산 성지와 지정환 신부
치명자산 성지와 지정환 신부

전주천 변에는 ‘치명자’라는 독특한 이름의 산이 있다. 원래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었는데 7명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후에는 ‘순교자’라는 뜻의 치명자(致命者)란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곳에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리 사람으로 전라도의 첫 천주교 신자였고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1756-1801년, 세례명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처 신희,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결혼 4년 동안 동정을 지키다가 처형되어 동정부부 순교자로 알려진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를 비롯한 일곱 명의 가족 순교자들의 합장묘가 있다.

1801년(조선 순조 원년) 천주교도를 박해한 신유박해 당시 유항검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에 잠입시켰다는 이유로 전주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처형 직후 그의 재산은 몰수되고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였던 그의 집은 파가저택(破家瀦宅, 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형벌)의 형을 받아 헐려 연못이 되었다. 이후, 그의 친지들이 그들의 시신들을 수습하여 유항검의 고향인 초남리와 인접한 김제군 용지면(현 제남리) 바우백이에 임시로 묻어둔 것을, 1914년 4월 19일 전주 전동성당의 주임신부인 프랑스인 보두네(Baudenet) 신부와 신도들이 승암산으로 옮겨 합장했다.

치명자산 인근 전주천변에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하여 초록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 역시 천주교 신자인 두 명의 15세 소년이 순교한 터이다. 1886년에 남종삼(요한)이 순교한 뒤, 아들 남명희도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해까지 처형이 연기되었고, 그를 불쌍히 여긴 전라 감사가 “배교하고 새 삶을 찾으라.”고 수차례 권고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듬해 그가 성년이 되자 전라 감사는 남명희와 성명 미상의 홍봉주의 아들을 처형하게 되는데 차마 목을 베지 못하고 초록바위 위에서 전주천 아래로 떠밀어 수장시켰고 그 슬픔을 지닌 초록바위는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는 17세기 초 중국에서 들여온 서적을 통하여 조선에 처음 소개되어 전파되면서, 유교 이외의 어떤 종교나 학문도 엄격히 금지하던 그 시절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전주는 한국 최초의 자치 교구로 박해를 피해 피신해 온 신자가 많았었는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순교한 곳이다. 윤지충은 외사촌 정약용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전해진다. 그는 1791년 어머니가 죽자 외종사촌인 권상연과 상의하여 천주교 의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아 당시 거주했던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에서 전주로 압송되어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그들이 순교한 지 100년 뒤인 1891년 순교 터인 풍남문 앞에 보두네 신부가 터를 마련하고, 1908년 명동성당을 완공한 프와넬(Poisnel) 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 준공된 성당이 전동성당이다. 당시 일제가 전주에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풍남문 성벽을 헐었는데 그 성벽의 돌을 가져와 성당의 주춧돌로 사용하여 순교 장소에 있던 돌로 신앙의 요람임을 입증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가 짙게 남은 전동성당은 지난 4월 13일에 선종(善終)한 지정환(Didier t’Serstevense)신부가 1960년 전주교구로 와 한국이름을 얻은 곳으로 그가 전북에 발자취를 남긴 출발점이기도 하다.

작년 12월과 지난 3월에 만난 생전의 지정환 신부는 모든 일은 다 우연이 아닌 운명이고 다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말을 했다. “내 이름 성이 한자로 지(池)인데, 사실 땅지를 생각한겨. 농민들 밑에 들어가려고 땅지 같은 지씨가 된거여. 이것이 운명이지. 벨기에의 귀족이 한국의 상놈이 된 거여” 지신부는 그렇게 사람들 밑에 들어가 거하며 첫사랑이라 말하는 부안을 비롯해 고향으로 여기는 임실의 농민들과 무지개 가족인 장애인들과 전주와 완주에서 함께 했다.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무명(無名)으로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을 인정하며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들에게 다가가 함께 있어라. 그들에게 배워라. 가르치는 게 아니여~ 먼저 배워! 그리고 사랑해라~” 이 말은 신학대학 시절부터 소명으로 지녀온 말로 성직자로 한국에서 살았던 60년간 사랑을 실천하고 헌신하는데 지신부의 지침이 되었다.
 

무지개 가족을 소개하는 지정환 신부
무지개 가족을 소개하는 지정환 신부

평상시에 무명, 무교육, 등 ‘없을 무(無)’자를 자주 쓰게 된 이유도 임실뿐만이 아니라 도착해 만나는 사람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가진 것도 없다”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직자로 창세기에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느님을 본받아 할 수 있는 것을 했다고 하였다. 그 중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소외 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과 “교육”이었다. 무지개 가족이 1984년 설립되었을 당시 수용시설과 같은 곳을 지신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시설로 바꾸고 싶었다. 1층의 넓은 방에 중증 장애인과 경증 장애인 두 사람씩 거처하며 서로 돕게 하였고, 2층에는 독방을 만들어 봉사자가 열심히 일하고 쉴 때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후 그 공을 인정받아 호암재단에서 받은 상금을 마중물로 하여 장학재단을 설립했으며 그것이 지금의 장애인을 돕는 무지개 재단이 되었고, 이후 거처 공간도 자립관(自立館)이란 이름으로 하여 장애인들이 온전히 자립에 대한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서, 그것도 전북에서 60여년을 지내 온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지신부의 운명이었고 전북의 행운이었다.

지신부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자의 “공수신퇴(功遂身退) 천지도(天之道)”란 말처럼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 이도 하늘의 뜻이라 했다. 지신부의 장례식장에는 그의 유언대로 그의 방 안에 있던 십자수를 영정으로 하고 장례미사에는 노사연의 <만남>을 작별의 노래로 함께 불렀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신자와 임실군민들을 비롯한 도민들과 사랑을 받은 장애인들의 감사와 애도 속에 전주교구 성직자의 묘소가 있는 치명자산에 묻혔다. 지신부가 남긴 정의롭고 환한 흔적은 지역의 천주교 성지에 더해 그가 한없이 사랑했던 임실과 완주와 전주를 비롯하여 부안과 전북을 아우르며 묘소가 있는 치명자산에 이르기까지 지신부를 기리는 길로 오랫동안 기억되며 지역에 남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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