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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의 십자가
동교동의 십자가
  • 위병기
  • 승인 2019.04.22 1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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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는 주요 인사를 말할때 그가 기거하던 곳의 지명을 대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예를들면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을 말하는데 이는 그가 마지막 까지 머물다간 사저다. 오늘날 강북 삼성병원 자리인데 광복 후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경교장에 머물렀다.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말하며, 안국동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양반가 한옥인데 윤보선을 의미한다.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은 사실 오랫동안 김종필 이라는 의미였다.유신정권이나 5공때 언론은 함부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나 김영삼을 거론할 수 없었다. 대신 마포구 동교동에 사는 김대중을 일컬어 ‘동교동’으로, 동작구 상도동에 사는 김영삼은 ‘상도동’이라고 담아냈다. 40년 넘게 동교동과 상도동은 한국의 야당사 그 자체였다. 양김(兩金)과의 대결에서 소석 이철승이 밀리면서 전북 출신 정치인은 대부분 동교동계에 둥지를 틀었다. 김원기, 한광옥, 김태식, 조세형,정균환, 최락도, 이협, 최재승, 윤철상 등 이루 셀 수가 없다. 시간이 좀 지나 유종근, 정세균, 정동영 등도 동교동계가 발탁한 젊은피였다.흔히 인장지덕 목장지폐(人長之德 木長之弊)라고 한다. 인간은 큰 사람 밑에 있어야 덕을 입고. 나무는 큰 나무 밑에 있으면 해를 입는다는 의미다. 이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동교동의 그늘은 수양산 자락을 덮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아들에게 만큼은 아버지로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많이 줬다. 대표적인게 장남 김홍일이다. 오늘(23일) 장례를 치르는 칠십평생 김홍일의 삶은 참으로 지난한 것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해 굽힐때 타협하지 않은 야당 지도자를 아버지로 둔 업보였다. 한쪽에선‘북에는 정일이(김정일), 남에는 홍일이(김홍일)’라는 비판이 나왔으나 아버지로서 무한한 빚을 진 김대중은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큰아들 김홍일에게 국회의원 배지를 3번이나 달아준다. 노벨평화상을 받고 대통령이 됐지만 아버지로서는 자식에게 한없이 미안했다는 얘기다. 사연 하나를 들어보면 너무나 가슴이 저린다. 사형선고가 확정된 뒤 청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김대중은 1981년 장남 김홍일의 편지를 처음으로 받았다. 김대중 회고록을 보자.“봄기운이 조금씩 스며들던 4월의 어느 날, 큰아들 홍일에게서 편지가 왔다. 발신지는 대전교도소였다. 작년 5·17 이후 헤어진 뒤로 오늘까지 거의 1년을 아무 소식을 못 듣고 있다가 편지를 받으니 가슴이 너무도 떨렸다.(중략)편지 겉봉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몇 시간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밤이 돼서야 이불 속에서 편지를 읽었다. 글씨가 안 보여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야 했다.”동교동 마음의 십자가였던 김홍일 전 의원의 영면을 빈다. /위병기 문화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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