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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① ‘정읍사’(井邑詞) 다시 알기
[전라북도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① ‘정읍사’(井邑詞) 다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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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0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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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노래
‘부부일심동체’ 민족의식과 맥 함께
제목·망부석 위치 등 풀어야 할 숙제도

오래 전부터 전라북도를 예향이라 일컫고 있다. 그런데 다른 지방 사람들이 전북이 왜 예향이며, 한국문학의 메카라 하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삼국시대 이후 한국문학의 발자취를 살펴 그 답을 찾아보는 의미에서 전라북도문학관(관장 류희옥)의 지상강좌를 마련했다.

 

정읍사 망부상
정읍사 망부상

전라북도는 대한민국 문학의 메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큰 기초가 되는 작품이 바로 ‘정읍사(井邑詞)’이다. ‘정읍사’는 백제 때의 민간 가요로서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고, 한글로 전해오는 유일한 작품이요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 ‘정읍사’는 노래로 불리던 것으로 본 내용에 여음구가 붙여지게 되었다. 본 내용만 추리면 3장 6구의 시조 형식을 띠는데, 이를 근거로 ‘정읍사’를 시조의 원형으로 삼기도 한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 全져재 녀러신고요. 즌 데를 드데욜셰라. / 어느이다 노코시라. 내 가논 데 졈그를셰라.”

석 줄의 짧은 가사에 지나지 않으나, 이 노래가 이토록 오랜 세월 불리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첫째,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평이하고 소박한 내용이다. 행상 나간 지아비를 걱정하는 지어미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헤아릴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다.

둘째, 이 작품에서 ‘달’은 작품의 배경이 되면서 이 시의 가장 강력한 상징성을 띤다. ‘달’을 통해 지어미의 간절한 기원은 온 누리로 확장된다. 또한 “전져재 녀러신고요”(전주시장을 다니시는가요)라는 구체적인 상상은 지역 명칭과 더불어 실감을 주면서 시적 형상화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셋째, ‘즌 데’(진 곳)와 ‘졈그를셰라’(저물세라)가 가지는 은유는 이 시를 최고의 시로 끌어올린다. 사실 ‘땅이 진 곳’ 그 자체를 걱정할 여인은 없을 것이다. 이 ‘진 곳’은 여염집 여인들이 가장 염려하는 곳, 즉 여자들의 유혹이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을 말할 것이다. 술집이나 유곽쯤으로 생각하면 딱 맞을 그런 은유다. 그러니 이 노래에 담긴 여인의 마음은 사실 보이지 않게 애가 닳는다.

그러한 실정이니 이 지어미에게는 지아비가 벌어올 돈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낭군님이 염려될 뿐이다. 그래서 “어느이다 노코시라”는 지극히 자연스레 다가온다. “어느 것이든 다 놓고 오십시오.” 이 말 한마디는 얼마나 통쾌한 표현인가.

“내 가논 데 졈그를셰라” 역시 깊은 은유를 담고 있다. 어조의 흐름으로 볼 때 ‘내’는 남편을 가리킨다. 날이 저물어 남편이 ‘진 곳’을 밟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편이 해를 입어 어둠 속에 빠지면 지어미 자신의 삶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내’는 지아비와 지어미 자신을 동시에 함축하는 표현이 된다. 이는 ‘부부일심동체’라는 우리 민족의 사상 체계와도 맥을 함께한다.

이렇듯 평이하면서도 여염집 여인의 염원이 지극한 사랑으로 형상화된 작품은 찾기가 쉽지 않다. 한글로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노래가 이러할진대, 이 ‘정읍사’는 우리 전라북도의 문학적 자긍심을 갖게 하는 출발점이라 하겠고, 우리 도민은 이 ‘정읍사’를 더욱 소중히 아낄 수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이 ‘정읍사’는 여러 가지로 풀어야 할 게 있다. 이 노래는 백제 노래인가 신라 후기 노래인가, 제목이 ‘정읍’인가 ‘정읍사’인가. 노래 속 가사가 ‘全져재’인가 ‘져재’인가. 망부석의 위치는 어디인가 등이 그것이다. 원광대 국문과에 재직하였던 이상비 교수는 『새 자료에 의한 한국문학사의 재평가』(1997)라는 저서의 「백제가요 ‘정읍’ 신고」라는 논문을 통해 ‘정읍사’와 관련한 내용을 자세히 밝혀 놓은 바 있다. 그 중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명이 정촌현(井村縣)에서 정읍현으로 바뀌게 된 것이 경덕왕 16년(757)이니, ‘정읍사’는 백제의 노래가 아니고 신라 후기의 노래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비는, 일단 지명이 개정되면 그 지명으로 된 모든 명칭은 일제히 고쳐져서 통용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향가 ‘처용가’에서 ‘서라벌’이 ‘동경’으로 고쳐졌듯이 ‘정촌(井村)’ 역시 ‘정읍’으로 고쳐져서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즉 ‘정읍사’는 신라 후기 경덕왕 16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 백제 때부터 불려왔다는 것이다.

이상비는 본래 노래의 명칭이 ‘정읍’인데 김태준이 『고려가사』에서 ‘정읍사’로 명명하면서 명칭이 ‘정읍사’로 굳어진 게 아닌가 보고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의 향가 관련 진술 또는 『고려사』의 속악 관련 진술을 통해 ‘사(詞)’는 ‘가(歌)’의 개념이 아닌 ‘가사(歌詞)’ 곧 노랫말의 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唱海歌詞曰”(해가를 불렀는데 노랫말은 가로되)처럼 “歌井邑詞”(정읍을 불렀는데 그 가사는), “唱動動詞”(동동을 창하였는데 그 가사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정읍사’의 본래 명칭은 예로부터 ‘정읍’이지 ‘정읍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정읍사
악학궤범에 기록된 정읍사

『악학궤범』에 나오는 “後腔全져재녀러신고요”의 ‘후강전’을 악곡상의 명칭으로 보고 “져재 녀러신고요”로 여겨 왔으나, 이상비는 ‘후강전’이라는 악곡 명칭은 없고 ‘전져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완산지(完山誌)(1958년 간)를 입수하였는데, 원본이 조선 정조 때인 이 책을 통해 ‘전주’를 ‘전’으로 표기한 사례를 두 곳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전주를 ‘전’으로 쓰게 된 연유로 한문의 약칭성향을 들었고, 또한 노래의 가사이기에 ‘전주져재’보다는 ‘전져재’가 훨씬 노래 호흡에 맞다는 김형규의 주장(『고가요주석』, 1968)을 소개하며 이에 힘을 싣는다.

망부석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읍현의 “望夫石在縣北十里……其曲曰井邑”(망부석은 관아에서 북으로 십리에 있다. 그 곡의 이름은 정읍이다)라는 표현에서 그 근거를 삼게 된다. 그런데 망부석의 위치로 잡은 현재의 ‘정읍사공원’은 백제 당시의 현을 추론하여 정한 것으로 현을 지금의 ‘정해’(井海, 샘바다)로 잡은 것이다. 이상비는 ‘현북십리’는 당연히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할 당시의 현청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의 표기에서도 ‘정읍사’가 아닌 ‘정읍’으로 표기된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상비는 당시의 현청 자리를 자료를 근거로 하여 찾았는데, 호남고등하교와 동초등학교의 중간 지점에서 동초등학교 쪽으로 2분의 1쯤 다가선 지점으로 보았다. 그렇게 찾아낸 현청을 중심으로 내장산, 오봉산, 반등산 등의 거리를 역산하여 망부석의 위치를 제시하였다.

“그곳은 정읍시 북면 승부리 너머의 오르막의 면소재지가 보이는 곳이 꼽힐 뿐이다. 따라서 이곳의 오르막의 산석을 골라 망부석을 삼을 것이고, 적당한 돌이 없다면 조형물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악학궤범에 나오는 백제 당시의 망부석은 긴 세월 동안 얼마든지 망실될 수도 있고,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망부석을 가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읍’이라는 악곡은 엄연히 불렸었고, 그 가사 또한 엄연히 전해오고 있다. ‘정읍사’를 ‘정읍’으로 바로잡기도 힘들고, 이미 세워진 ‘정읍사공원’을 옮기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가려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이다. 최소한 망부석이라도 제 위치에 세우고 그 진실이라도 알리는 작업을 해나간다면 그 노력 또한 찬사로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전라북도를 한국문학의 메카라고 하며 자부한다면, 전라북도 차원의 협조와 지원 또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진실을 밝혀 주시라.

 

/김광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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