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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재발견] 강천산 봄 풍경 - 봄나들이 하기 좋은 곳
[전북의 재발견] 강천산 봄 풍경 - 봄나들이 하기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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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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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전북여행

“이바 니웃드라, 山水(산수) 구경 가쟈스라.”

 

강천사의
상춘곡(賞春曲)

紅塵(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生涯(생애) 엇더한고. 녯 사람 風流(풍류)랄 미찰가 맛 미찰가. 天地間(천지간) 男子(남자) 몸이 날만한 이 하건마난, 山林(산림)에 뭇쳐 이셔 至樂(지락)을 모랄 것가.

‘속세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내 삶이 어떠합니까? 옛사람들의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요? 세상에는 나만큼 사는 사람도 많겠지만 어찌 그들은 어찌하여 나처럼 산림에 묻혀 지극한 낙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일까요?’

조선 성종 때 단종의 폐위를 보고, 이 고장 태인으로 내려와 띠집을 짓고 살면서 부른, 불우헌(不憂軒) 정극인의 가사 ‘상춘곡’의 첫머리입니다.

봄을 즐기는 노래를 직접 듣고 보고 싶어졌습니다. 도회인의 삶이란 회색빛 감옥에 욕망을 가득 품은 채 갇혀 사는 신세이지요. 현대인은 기온의 변화만으로 계절을 인식하고 값진 옷으로 가리고 벗으며 사는 기계적인 삶이 아니던가요.
봄이 왔습니다. 미칠 것 같은 봄이 아파트(홍진)에 묻혀 사는 나그네를 부릅니다. 나섰습니다. 강천산 계곡길을 찾아서.

강천산은 순창군립공원입니다. 군립공원으로서는 우리나라 1호라지요? 봄 단장이 한창입니다. 매표소 앞 주차장에 조형물이 새로워지고 길을 다듬는 공사가 야간 조명과 영상을 통한 스크린을 설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상춘객을 맞을 준비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桃花杏花(도화 행화)난 夕陽裏(석양리)예 퓌여 잇고, 綠楊芳草(녹양 방초)난 細雨中(세우중)에 프르도다.

가는 길에 복숭아꽃 살구꽃 대신 철쭉이 기지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매미 꽃과 미나리냉이 꽃도 길가를 치장하고 있습니다. 해질녘이 되어도 꽃은 지지 않았고 연두 빛 봄빛이 가득했습니다.

어제 내린 비는 가랑비(細雨)가 아니라 상당했나 봅니다. 작달비(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비)는 아니어도 발비(빗줄기가 발처럼 보이는 비)는 되었는지 시내의 물이 힘차 보였습니다.

 

아기자기한
강천산 봄 풍경

칼로 말아 낸가, 붓으로 그려낸가, 造化神功(조화 신공)이 物物(물물)마다 헌사랍다.

나그네의 지난겨울은 황량했습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겨우내 우울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이 듦이 신체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정신에도 엄습했던 겨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과 그리고 독백으로 얼룩진 내면과의 대화가 일상이었지요. 자연 나태에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강천사 가는 길이 삶을 힘차게 해주는군요. 봄의 약동, 봄의 왈츠가 시작되는 것을 느낍니다. 심장의 고동이 시작됩니다. 칼로 재단한 것일까요, 붓으로 그려낸 것일까요. 조각품과도 같이 그린 그림과도 같이 아름답습니다. 조물주의 신비로운 솜씨가 삼라만상에 헌사(야단) 스럽게 드러났다고나 할까요. 내 심장의 고동은 순전히 그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시원한 폭포는 가슴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맨발로 건강을 다지는 길이 강천산 계곡 길입니다. 길바닥을 고운 흙으로 단장해 두었습니다. 편리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문화와 문명의 틀 속에서 자신의 삶을 가둬 두고 살지요. 그래서 야생은 두려움이요, 야생의 삶은 모험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안전한 삶을 살고 있지요. 하지만 문명의 커튼을 걷어내는 순간 어떻게 될까요. 극한에 이르면 우리도 동물의 본능으로 생존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신발을 벗고 걷는 순간이 그 시작입니다. 그러나 100미터도 못 가서 신발을 신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요. 우리는 이렇게 나약해져 있습니다.

수풀에 우난 새난 춘기(春氣)랄 맛내 계워 소래마다 嬌態(교태)로다. 物我一體(물아 일체)어니, 興(흥)이애 다랄소냐. 柴扉(시비)예 거러 보고, 亭子(정자) 안자 보니, 逍遙吟詠(소요 음영)하야, 山日(산일)이 寂寂(적적)한대, 閒中眞味(한중 진미)랄 알 니 업시 호재로다.
그래서 귀를 열었습니다. 아 새소리! 새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멀리서 비둘기가 울고 휘파람새(?)가 가는 길을 안내합니다. 새소리뿐인가요. 귀여운 다람쥐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재롱을 떠는 모습이 정말 귀엽습니다. 거기에 시냇물 소리까지! 나그네는 이제 자연인이 되어갑니다. 물아일체의 경지가 별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연둣빛 봄의 잔치에 초대되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리는 경지. 그야말로 자연의 일부분으로 스며들어버리는 순간의 감흥, 이는 혼자가 되어서도 여럿 중에서도 느낄 수 있는 절대의 경지가 아닐까요.
과장되어 말한다면 접신(接神)의 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시비(柴扉) 대신 돌담길을 걸어보고 정자에도 앉아서 나그네는 서서히 자연스러운 시인이 되어버립니다. 산속의 낮은 적적한데 그 한가함 속의 그 맛, 진미라니!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참된 맛.

이바 니웃드라, 山水(산수) 구경 가쟈스라. 踏靑(답청)으란 오날 하고, 浴沂(욕기)란 來日(내일) 하새. 아참에 採山(채산)하고, 나조해 조수(조수)하새.

그래서 이 강천산 계곡으로 산수 구경 왔습니다. 이웃들과 같이하면 더 좋겠지만 혼자면 또 어떻습니까. 다행히 나그네는 아내와 동행했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걷는 것처럼 좋은 운동이 없다지요. 아내는 걷기 운동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같이 걷는 길이 되었군요. 이 길은 끝이 없는 길이란 가사가 있는 노래를 나지막하게 흥얼대었습니다. 짙은 연둣빛 봄풀을 밟는 들놀일(답청)을 하고 있습니다. 목욕은 집에 가는 길에 온천을 들를까요. 아내의 손을 가만히 잡습니다. 고생한 손. 이 일도 오랜만이군요. 우리는 여태 어떻게 살아왔을까. 새삼스레 아내를 봅니다. 같이 한세월이 얼굴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고사리를 꺾거나 낚시는 그만둬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길에서는 말이죠.

갓 괴여 닉은 술을 葛巾(갈건)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和風(화풍)이 건듯 부러 綠水(녹수)랄 건너오니, 淸香(청향)은 잔에 지고, 落紅(낙홍)은 옷새 진다.

술을 들 여유는 없어서 베로 거른 막걸리는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한때 젊은 시절엔 꽃 꺾어 술잔을 세며 먹는 끼도 부렸지요. 봄날의 흥취에 객기를 부린 셈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간 세월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낭만의 벗들도 이제는 술잔을 조금씩 멀리합니다. 하니 이렇게 춘흥을 다사로운 봄바람에 실어봅니다. 푸른 계곡물 위로 넘어오는 문득문득 불어오는 저 바람에 이미 저는 취해 버렸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까지 맑은 향기의 봄술(春酒) 향기가 배어나고 붉은 철쭉꽃이 사람들의 옷을 밝게 비춰주는 이 강천사 가는 길에서!

微吟緩步(미음 완보)하야, 시냇가의 호자 안자, 明沙(명사) 조한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淸流(청류)랄 굽어보니, 떠오나니 桃花(도화)ㅣ 로다. 武陵(무릉)이 갓갑도다, 져 뫼이 긘 거인고.

봄날은 갑니다. 아니 내 인생의 봄날은 갔습니다. 가버린 내 봄날이 시냇가 깨끗한 물에 영상으로 떠 오릅니다. 조용히 혼자 앉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몇 잎 꽃잎도 떠 있습니다. 불우헌은 복사꽃으로 보였을 꽃잎. 꽃잎은 맑은 소리를 내는 여울을 따라 흘러갔습니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겠습니까. 이 편안하고 황홀한 이 마음자리가 곧 도화원(桃花源)이 아니겠습니까.

松間(송간) 細路(세로)에 杜鵑花(두견화)랄 부치 들고, 峰頭(봉두)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千村萬落(천촌 만락)이 곳곳이 버러 잇네. 煙霞日輝(연하 일휘)난 錦繡(금수)랄 재폇난 닷. 엇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有餘(유여)할샤.

‘소나무 사이사이 작은 길’ 대신 울창한 메타세쿼이아 길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작은 길들이 구불구불 이어졌을 이 길에 벤치가 놓이고 사람들은 집에서 준비해 온 간식을 듭니다. 진달래(두견화)를 들고 가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자연보호가 일상화된 이 시대는 역설적이지만 자연사랑의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산으로 가는 길을 접고 저는 평길을 계속 걷습니다. 산에 올라보면, 안개와 놀과 햇살로 빚어진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은 마치 수놓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겠지만 이 시냇가 평길도 이에 만만치 않습니다.

검던 겨울의 들에 벌써 봄빛이 풍성히 넘치고 있습니다.

功名(공명)도 날 끠우고, 富貴(부귀)도 날 끠우니, 淸風明月(청풍 명월) 外(외)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 簞瓢陋巷(단표누항)에 흣튼 혜음 아니 하내. 아모타, 百年行樂(백년 행락)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아담하고 소박한
강천사

드디어 강천사(剛泉寺).
아담하고 소박한 절집입니다. 불경의 말씀이 맑은 목소리로 귀를 파고듭니다. 속세의 욕망을 버리는 곳. 탐진치(貪瞋痴)의 삼독(三毒)에서 벗어나면 헛된 생각도 소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석가탄신일이 가까워졌군요.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하기 위해 궁을 버린 석가의 자비 정신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름을 드날리는 것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려 따르지 않으니 맑은 바람이며 밝은 달 외에 어떤 벗이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소박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는 이 시골살이에는 허튼 생각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무렇든지 한평생 이렇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됐지 않겠습니까.  만족하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욕망이 다 하는 날에 우리의 삶도 끝이 오겠지요. 그러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을 알기에 현자(賢者)는 그 욕망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아닐까요? 봄날에 가는 강천산 길은 욕심을 다독이는 길이었습니다. 끝없는 연둣빛의 잔치에 초대된 나그네는 되돌아오는 길에 자신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평생을 같이 걸어온 오랜 벗, 아내의 손을 다시 잡으며 지친 걸음을 터벅터벅 보조를 맞추어 걸었습니다. 이 길은 끝이 없는 길이면서도 끝이 있는 길이기에........ .

/글·사진 = 이희규(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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