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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7. 천년비색을 지닌 부안청자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7. 천년비색을 지닌 부안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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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1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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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물가풍경 무늬 병. 사진제공= 부안청자박물관
청자 물가풍경 무늬 병. 사진제공= 부안청자박물관

“나무를 베어 남산이 민둥해졌고 / 불을 지피니 연기가 해를 가렸어라 / 푸른 자기 잔을 구워내 / 열에서 우수한 하나를 골랐구나 / 선명하게 푸른 옥빛이 나니 / 몇 번이나 연기 속에 묻혔었을까나 / 영롱하기는 수정같이 맑고 / 단단하기는 산골(山骨, 자연동)과도 같네 / 이제 알겠네 술잔을 만든 솜씨는 / 하늘의 조화를 빌려왔나 보구려 / 가느다란 꽃무늬를 놓았는데 / 묘한 게 단청을 그린 것과 같구나...” 『동국이상국집』에 ‘김군이 녹색 자기(綠磁)잔을 두고 시를 지어 달라 하기에 백거이의 시운에 따라 함께 짓다.’란 제목으로 실린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구이다.

백운거사라는 호를 쓴 고려문인 이규보의 자는 춘경이며 본래 이름은 인저(仁氐)였다. 뛰어난 문장가인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과거시험 공부를 게을리 한 탓에 고려 시대 과거시험인 사마시에 거듭 낙방하였다. 그러다 ‘규성(奎星)이 장원할 것’이라 일러주는 꿈을 꾸고 이름을 규보로 바꾼 뒤 꿈과도 같이 장원급제했다. 32세가 되는 해인 1199년에 전주목사록에 임명된 이규보는 서기를 겸하는 관직을 받아 전주목(全州牧)으로 오게 된다. 함께 근무하던 동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기까지 일 년 반 남짓 동안 우리 고장에 머물렀고, 파직 후 <전주를 떠나며>란 자신의 심경을 남긴 시 외에 전라도 지역의 기행문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남긴 바 있다.
 

『동국이상국집』 김군이 녹색 자기 잔을 두고_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김군이 녹색 자기 잔을 두고_이규보.

그가 남긴 명문의 글 중에는 생활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글들이 많은데, 특히나, 고려청자에 관해 남긴 몇 수의 시는 청자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보다 몇 년 앞서 송나라 사신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도자기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翡色)이라 부르며, 근래 이르러 고려 도자기의 제작이 공교해졌으며 색을 쓰는 것이 더욱 아름다워졌다”라고 중국의 비색(秘色)과 다른 특별한 고려청자의 비색에 대한 기록을 한 바 있다. 송나라의 사신도 고려청자의 아름다움과 제작기술에 감탄했듯이 이규보의 시구도 살펴보면 청자 상감기법에 대한 제작기술을 표현하였고, 잔을 빚은 도공의 솜씨를 하늘의 조화라고 칭송하였다. 청자에 대한 감흥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이규보가 청자에 조예가 깊은 것은 부안 변산에서 왕실의 재목을 관리하는 관직을 지낸 영향으로 보인다. 당시 부안 일대는 최고의 고려청자 생산지였다. 추측건대 이규보가 인근에 있는 청자의 산지에서 제작과정을 살펴보며 안목을 넓혔고 그 심정을 글로 담은 듯싶다. 부안이 고려청자의 산지로 유명했던 이유는 지리적 환경이 주요했다. 부안은 흙과 물이 좋고 나무가 울창해 땔감이 풍부하여 양질의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서해 뱃길을 따라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각 고을로 운송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두루 갖춘 최적의 지역이었다.

가장 좋은 청자를 생산했던 곳이 바로 부안과 강진이다. 강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시대 국가에서 수공업을 운영하던 특수행정구역인 ‘소(所)’로 기록되어 있고 고급 청자를 제작한 곳으로 일찍이 알려진 곳이다. 이에 반해 부안일대의 가마는 ‘소’로 표기된 기록이 없지만, 12조창(조운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모아 개경으로 운송하는 창고)의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는 중요한 고장으로 고려청자의 최전성기에 아름다운 청자를 생산한 곳이다. 왕의 상징인 용과 파도가 상감되어 있는 청자상감용문매병의 파편과 국가의 관리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간지(干支)가 있는 청자 중 임오(壬午)명이 새겨진 파편이 발견되어 왕실의 자기를 제작했음이 증명되었고, 장인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명문 등이 음각된 청자의 굽바닥이 발굴되어 고려청자의 맥락을 엿볼 수 있다.
 

부안 유천리 가마터 퇴적구와 물가풍경 청자 유물. 사진제공= 부안청자박물관
부안 유천리 가마터 퇴적구와 물가풍경 청자 유물. 사진제공= 부안청자박물관

유천리와 진서리에 가마가 있던 부안은 고려왕실과 귀족계층에 공급한 최고급의 청자에서부터 포개어 구운 생활용 그릇까지 다양한 자기를 제작한 곳이었다. 유천리 가마터는 1929년 일본학자 노모리 켄(野守健)이 조사하여 1934년 학계에 소개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도굴되는 수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수습된 청자의 파편들은 유천리 가마에서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려청자 계보를 연결하고 있다. 그 귀중함을 인정받은 부안의 유천리 12호 가마터 일대는 1963년 국가 사적 제69호로 지정받아 주요 유적지가 되었고 진서리터는 사적 70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에는 도공의 마음에 덜 차 깨어지고 조각나 폐기장에 버려졌겠지만, 이곳에서 발굴된 청자의 파편은 온전한 모습을 상상하게 하며 감탄과 아쉬움 속에 같은 문양의 국보급 유물의 출처를 증명해 주고 있다. 유천리(柳川理)란 지명도 그러하다. 그 이름은 고려청자의 백미 “물가풍경무늬”의 문양으로 버드나무와 어우러진 내가 흐르는 마을을 눈앞에 펼쳐 놓는다. 휘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물가풍경으로 드리워진 곳에 물새들이 물위를 노닐며 유영하는 모습이 유려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청자 물가풍경 무늬 완>과 <청자 물가풍경 무늬 주전자>와 유천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파편 등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이렇듯 자연의 정취와 낭만을 비췻빛 청자와 어우러지게 빚어낸 도공의 솜씨는 이규보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로 감탄하게 했으리라.
 

청자 상감 물가풍경 매화 대나무 무늬 주전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상감 물가풍경 매화 대나무 무늬 주전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천리 가마는 14세기 말경까지 왕실의 가마로 고려청자의 찬란한 꽃을 피우다가, 왜구의 잦은 침탈과 도공들의 피란으로 피해를 받고 쇠락한 고려와 운명을 함께하며 백자에 자리를 내주다 맥이 끊겼다. 하늘빛 고운 청자를 빚고 아로새겼던 그 노고까지도 청자의 파편과 더불어 땅속에 묻혔지만, 2011년 그 가치를 조명하고 정신을 계승하고자 유천리에 ‘부안청자박물관’이 개관되면서 많은 이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천혜의 자연과 더불어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빚어낸 도공과 그의 솜씨를 노래한 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후대들에게는 모두 귀한 선물이다. 고귀한 비색을 품고 있는 부안의 봄날이 한창인 지금, 부안청자가 남긴 고려의 품격을 찾아 버드나무 물가풍경이 아름다운 마을로 시간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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