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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안식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안식
  • 김은정
  • 승인 2019.05.16 20: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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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한 조간신문에 일본 홋카이도 대학 연구실에서 한국 동학농민군지도자 유골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발견된 유골은 6개. 그 중 하나, 신문지에 쌓인 유골이 들어있던 종이상자에 신원을 알려주는 부표가 끼워져 있었다.

‘메이지 27년 (1894년) 한국에서 동학당이 궐기 하였는바, 전라남도 진도는 그들이 창궐한 곳으로 이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수백인을 살해하여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는데 그 중 수괴자는 효수에 처하였는바, 이 유골은 그 중의 하나로서 그 섬을 시찰하러 갔다가 채집한 것 임 -사토 마사지로’

일본 교도통신 기사의 일부를 인용한 이 1단짜리 기사를 주목한 사람은 당시 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한승헌 변호사였다. 당시의 상황을 한 변호사는 이렇게 기억한다.

“일제가 수없이 많은 한국인을 징병 징용 정신대 위안부 등으로 끌어갔지만 죽은 사람의 두개골까지 가져갔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만행이었다. 더구나 90년 동안이나 대학연구실의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상황은 큰 충격이었다.”

진상규명과 봉환 작업이 시작됐다. 왜 일본인 사토는 농민군의 유골을 가져갔을까.

한국의 진상규명 요구에 북해도대학 조사위원회는 유골이 당시 농민군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 경위나 명확한 실체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자들은 과거, 일본 국립대학들이 인종론과 식민학과 같은 침략정책을 뒷받침하는 연구과제를 수행했던 점을 주목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식민학과 인종론은 일본이 자행한 반인륜적인 또 다른 침탈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듬해 5월 동학농민군지도자 유골 봉환이 이루어졌다. 고국을 떠난 지 90년. 농민군지도자는 안식을 찾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연구자들의 열정이 이어졌지만 누구의 유골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안식처를 찾기 위한 여정 또한 고단했다.

대학 연구실과 박물관 등을 오가며 황망하게 보낸 지 23년. 농민군지도자의 유골이 비로소 안식처를 찾았다. 갑오년 농민군들의 전주입성 함성이 울려 퍼졌던 완산칠봉에 건립된 녹두관이다. 6월 1일 전주 일원에서는 농민군지도자를 추모하는 장례의식이 진행된다.

봉환을 즈음해 ‘분노 뒤에는 우리 자신의 허물에 대한 깨달음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던 한 변호사의 자성이 새삼스럽다. 뒤늦은 안장에 죄스러움이 더 커진다. 부디 편히 영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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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ㄹㅇㄹ 2019-05-17 16:24:16
전북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