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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웅치·이치전투 재조명 (상) 역사적 의의] 호남 곡창 지켜 조선 구한 전투
[임진왜란 웅치·이치전투 재조명 (상) 역사적 의의] 호남 곡창 지켜 조선 구한 전투
  • 김윤정
  • 승인 2019.05.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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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평양 주둔한 왜군 철수에 결정적 기여
한산·행주·진주대첩에 버금가는 전투 평가

임진왜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호남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전주로 진격하는 일본군의 침입을 ‘이치·웅치전투’에서 격퇴한 것이 호남을 지킨 양대 축이었다. 그러나 호남의 곡창을 보전함으로써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웅치·이치 전투가 여전히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치·웅치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알려진 한산·행주·진주대첩에 버금가는 전투로 평가되지만 변방의 역사로 방치되고 있다. 이에 전북일보는 세차례에 걸쳐 이치·웅치 전투가 가진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조명해봤다.
 

21일 임진왜란 당시 호남과 조선왕조를 지켜 역사적으로 재조명 받아야 할 이치 전투지역에 기념비 하나만 외로이 세워져 있다. 조현욱 기자
21일 임진왜란 당시 호남과 조선왕조를 지켜 역사적으로 재조명 받아야 할 이치 전투지역에 기념비 하나만 외로이 세워져 있다. 조현욱 기자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 전북 진안·완주·금산 일대에서 벌어진 ‘웅치·이치전투’가 임란으로부터 조선을 지킨 원동력이 되는 중요 전투로 재조명되고 있다.

웅치와 이치는 각각 진안과 전주 사이, 충남 금산과 완주 사이에 있는 험준한 고개로, 금산을 점거한 왜군이 조선왕조의 정신적 심장이자 왜군으로부터 유린당하지 않은 유일한 전주로 가는 진격지로 활용했다. 만약 웅치·이치 전투에서 왜군을 막지 못했을 경우 전 국토가 유린당할 처지였던 셈이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웅치·이치 전투를 가장 큰 패전으로 꼽는 데에서 그 위상을 짐작케 한다.

웅치·이치 전투는 음력 7월 8일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서술돼 있는데 이때 왜군은 조선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전주를 치기로 마음먹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성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라도 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1000여 명의 조선관군은 그 두 배에 달하는 왜군을 이치에서 격파하며 조선왕조실록과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켰고, 한양과 평양에 주둔했던 왜군의 철수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에서 왜군을 몰아내는 데 기점이 된 것이다.

이치와 웅치전투는 결국 전라도를 지킴으로써 조선왕조를 지켜냈고 왜군의 침략야욕을 무산시킨 역사적 가치가 큰 전투다. 당시의 전장 모습을 보전하고 있는 이치·웅치 전투지 또한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담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임진왜란 전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만 부각돼 있다.

전북도와 완주군, 전북사학회가 지난 2017년 이치·웅치전적지의 역사재조명을 위한 학술대회를 열었지만 현재 전적지는 문화재 지정에서부터 관리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이치전적지의 경우 전북도와 충남도가 각각 별도의 서로 다른 지역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두 전투지의 사적지화를 위해 전적지 범위부터 올바르게 설정하는 역사의 재조명이 요구된다.

전북대 하태규 사학과 교수는 “일본인들이 삼대 대첩으로 웅치와 이치전투를 꼽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며 “그만큼 웅치와 이치전투가 한산도·행주·진주성 등 3대대첩에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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