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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 - 소금과 콩) 소금길 이야기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 - 소금과 콩) 소금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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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1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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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김용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우리 조상들은 조선팔도를 금수강산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정감록이라는 책에서는,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열 군데를 지목했다. 이른바 십승지지가 그곳이고 그중에 지리산의 운봉현 고을이 있다. 지금의 운봉읍, 인월면, 아영면, 산내면을 관할했던 운봉현은 지리산 깊숙한 요새의 고을이었다.

조상들은 십승지지의 땅이란 예로부터 질병이 없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전쟁이나 범죄가 적거나 없어서,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러한 요건이 충분하지 못한 지리산 운봉고을이 십승지지에 든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을 백성 모두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치적 기능이 탁월한 고을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지리산 운봉은 가야시대로부터 삼국,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요충지였다. 이곳의 전쟁 기록과 구전과 흔적이 그것을 설명해 내고 있다. 거기에 고원지대의 특성으로 냉해가 심해서 농사가 잘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것만을 보면 조선 십승지지의 땅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운봉은 1930년대 신작로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흔 아홉 고개를 넘어야 오갈 수 있었던 첩첩산중이었다. 

그곳에 든 운봉은 지리산 분지 속에 있는 작은 나라와도 같은 고을이었다. 외부 세계와도 소통이 쉽지 않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생활 세계를 가졌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노는 것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교육의 방법까지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을 가졌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자급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소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리산에서 자라는 붉나무에서 소금을 얻어 생활을 했다. 소금나무라고 불리는 붉나무는 오배자 나무라고 불렀으며, 가을이 되면 이 열매껍질에 생긴 짠 성분을 소금대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사용하게 될 소금이 필요하여 지리산 벽소령을 넘어 화개장터까지 가서 소금을 구해왔다. 지리산의 소금 길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운봉 사람들이 오갔던 지리산 소금길의 시원은 1500여 년 전 가야 기문국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의 왕국이라는 가야의 나라 기문국은 첩첩산중 지리산 속에 든 나라였다. 사람살이에 가장 중요했던 소금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로 나아갈 길은 지리산 화개재를 너머 하동으로 가는 길 뿐이었다. 그때로부터 생겨난 길은 운봉사람들이 서리 태 콩을 짊어지고, 화개재를 넘어 화개장터로 가서 소금으로 교환해 오는 소금길이 되었다. 화개장터의 유명했던 서리태콩 두부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었다. 삼십 명으로 이루어진 운봉의 소금무데미들은 지리산 소금길을 넘나들면서 소금과 서리태 콩을 주고받으며 살았다. 그 소금무데미 선창 꾼은 훗날 동편제 소리꾼이 되기도 했다. 지금 지리산 소금 길에 놓여 있는 간장소, 소금장수무덤 같은 흔적과 하동댁과 운봉댁의 소금장수 이야기는 지리산 염두고도의 정체성이다.

중국의 운남성을 지나는 차마고도 보다도, 더 사람 냄새난다는 한국의 염두고도(鹽·豆 - 소금과 콩)가 지리산에 있고, 그 출발지 운봉은 십승지지의 한 곳이기에 충분한 고을이었다. 사람살기 좋은 고을은 좋은 자연환경에 앞서 공동체 속에 든 사람 모두가 존재로 선행인 튼튼한 인문적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용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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