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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깃발
왕의 깃발
  • 김원용
  • 승인 2019.06.25 2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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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선임기자

전주의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다. 조선왕조와 관련된 유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李安社)가 살았다는 이목대와,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다는 오목대가 있다. 조경단에 전주이씨 시조묘가 봉안돼 있고, 경기전에 태조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런 유적들을 옆에 두고도 오늘을 사는 전주시민들에게 왕조의 발상지라는 점이 그리 큰 자부심이나 실감나는 역사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조선왕조가 그저 성씨의 본향 정도 수준 정도로 전주를 데면데면 여겼다면 이제와서 굳이 왕조의 발상지입네 요란 떨 일도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이 전주를 왕조의 발상지로 각별히 생각했던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잘 드러난다.

특히 경기전에 보관했던 태조영정을 챙긴 것은 유별났다. 세종 때 지은 경기전에 태조 영정을 봉안하면서 공조 판서를 보냈다. 영정을 봉안할 때 문무관을 뽑는 과거를 시행하기도 하고, 경기전 5리 길 안에 향을 피우기까지 했다. 종 9품의 참봉이 경기전을 지켰으며, 영정을 잘 간수한 관리에게 특별 승진도 시켰다.

“전주(全州)의 영정이 형세상 장차 여름을 지나게 되었는바, 습기가 스며들 걱정이 있을 듯하니 자주 봉심하고, 혹 본부 관사의 온돌방에다 보관하되, 불조심을 하는 등의 일을 십분 늘 신칙하라.”

광해군이 전라감사에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 지시한 걸 보면 조선 왕들이 태조영정을 얼마만큼 소중히 다뤘는지 알 수 있다.

역사적 평가를 접어두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 사건 처리에서도 조선왕조가 전주를 어떻게 여겼는지 보여준다. “전주가 조종(祖宗)의 어향(御鄕) 이니 전주에 있는 정여립의 조부 이상의 분묘를 낱낱이 파내어 이장하도록 하고, 또 그의 멀고 가까운 족류(族類)들도 모두 전주에서 내쫓아 딴 고을에 살도록 하라”고 선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중죄인을 치죄하면서 보통 해당 고을의 격을 강등시켰으나 전주를 예외로 한 적도 있다. 조선왕조가 조경묘와 경기전의 체면을 막중하게 여겨서다.

전주시가 한옥마을에서 국립무형유산원으로 연결되는 오목교에 조선시대‘왕의 깃발’을 걸었다. 전문가 자문을 거쳐 만든 왕의 행차에 사용되던 의장기 28기다. 왕조 발상지로서 시민들의 자부심과 함께 전주의 위상을 곧추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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