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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⑤ 이매창의 시 다시 알기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⑤ 이매창의 시 다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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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17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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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수절 기생, 이매창의 지고한 절창 …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이매창, 황진이·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조 3대 여류시인으로 불려
신석정 시인, ‘송도삼절’에 견주어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 ‘부안삼절’로
시대를 초월하여 만인 가슴 울리는 28세 연상 유희경 향한 애절한 사랑
당대 혁신적 정치가요 문장가였던 허균과 10년 동안 정신적 우정 교류
매창공원
매창공원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은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딸로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이라고 불렸고, 기생이 된 뒤에는 계랑으로 불렸다. 본명은 향금(香今), 자호는 매창(梅窓), 자는 천향(天香)이다. 조선조의 3대 여류시인을 꼽는다면 허난설헌(1563-1589), 황진이, 이매창을 든다.

서경덕(1489-1546),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컬어 ‘송도삼절’이라 하는 데 견주어, 신석정 시인은 촌은 유희경(1545-1636), 이매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이라 칭한 바 있다. 이매창은 현실 비애의 감성적 시인이었다. 그녀는 기생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으나, 결코 기생의 삶을 살지 않았다. 매창이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한 문사로는 유희경, 허균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매창의 수백 편 작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으나, 후에 아전들이 외우던 50여 편의 시를 개암사에서 간행하였으니, 다행이다.

어떤 선비가 구애시를 지어 허튼 수작을 보이자 매창은 다음 시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 선비는 무안해 하며 가버렸다. “평생 떠돌며 밥 얻어먹는 것 부끄럽게 여겨 / 달빛 어리는 매화만 사랑했어라. / 사람들은 내 그윽한 뜻 알지 못하고 / 손가락질하며 오가는 사람들 잘못 알고 있어라.”(‘愁思’)

사대부 중심의 권위적 사회에서 기생의 수절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창은 한 남자를 그리며 수절하였다. 수절의 대상은 촌은 유희경(1545-1636)이었다. 유희경은 천민이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소문이 났고, 그 결과 서경덕의 제자인 남언경에 발탁되어 예학을 배우게 된다. 상례(喪禮)의 전문가가 된 그는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많은 상(喪)에 초빙되었다. 예학에 밝은 유희경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발발 일 년 전인 1591년, 촌은은 부안으로 놀러갔다가 이매창을 만나 비로소 파계한다. 매창 역시 문장가로 소문난 촌은의 아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매창은 18세, 유희경은 46세, 28세 연상이다. 신분상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까. 그들에게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 이름 소문나(曾聞南國癸娘名) / 글 솜씨 한양까지 울리더라.(詩韻歌詞動洛城) / 오늘에야 참모습 마주하고 보니(今日相看眞面目) / 마치 선녀가 선계에서 내려온 듯하구나.(却疑神女下三淸)”[‘贈癸娘’] 촌은이 매창을 처음 만나고 감탄하며 지은 시다.

깊은 정을 나누고 헤어진 후 둘은 다수의 연정시를 창작한다. “그대 집은 낭주에 있고 / 나는 서울에 살고 있으니 /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 오동나무 비 뿌릴 제 창자 끊기네.”(‘懷癸娘’) 여기서 ‘오동나무’는 이매창의 상징으로서 ‘거문고’를 의미한다. 어디에서든 거문고 소리만 들으면 매창이 생각나고 창자가 끊어질 듯 그리움이 사무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유희경을 그리는 매창의 시다. “나에겐 옛 진나라 거문고가 있어 / 한번 타면 백 가지 감흥이 일어납니다. / 세상에 이 곡조 아는 이 없고 / 멀리 구산(緱山)의 젓대소리에 맞춰 봅니다.”(‘贈別’) 여기서 ‘구산의 젓대소리’는 유희경을 상징한다. 둘이 재회하기까지는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간다. 서울로 올라간 유희경은 상례의 전문가로 나라의 중요한 상(喪)들을 처리하였을 것이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아 유성룡을 도왔다. 그런 공로로 유희경은 전쟁이 끝난 뒤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이매창의 묘(전라북도기념물 제65호)
이매창의 묘(전라북도기념물 제65호)

유희경 외에 매창의 시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허균(1569-1618)이다. 처음 만난 1601년, 당시 허균은 32세, 이매창은 28세였다. 허균은 적서의 차별 등 사회제도의 모순을 타파하려 한 혁신적 정치가요 문장가였다. 평소 자유분방하여 많은 기생과 어울려온 그였지만, 매창과는 매창의 타계 시까지 10년 동안 정신적 관계로만 교류했다.

허균이 매창을 만날 당시, 매창은 김제군수 이귀(1557-1633)의 정인(情人)으로 알려져 그랬는지 슬기롭게 육체관계는 피했다. 허균은 ‘조관기행’에 매창과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축년 7월에 부안에 이르러 비가 쏟아졌다. … 매창이 거문고를 끼고 시를 읊는데, 인물은 비록 뛰어나지 않았으나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하루 종일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조카를 침실로 들여보냈는데 혐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32세 허균과 28세 매창은 첫 만남에 호감을 가졌으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걸림 없이 행동하던 허균이었지만 매창을 시 벗으로 여기며 교류한 것이다. 그건 매창의 높은 절의와 뛰어난 재능 때문이었을 것이고, 불우하게 요절한 천재 시인이요 자기 누이였던 허난설헌을 떠올리며 매창을 각별한 존재로 여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균의 다음 편지에는 상사의 고통 속에 피폐하게 살아가는 매창을 염려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날 당시에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십년 동안이나 이어질 수가 있었겠소. …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또한 다음 시에는 오로지 유희경만을 그리워하다 ‘조롱 속의 학’이 된, 이미 병을 얻어 쇠약해가는 매창의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짝도 없이 야윈 몸으로 시름겹게 서 있으니 / 황혼녘 갈가마귀는 숲 가득 지저귀네. / 긴 털 병든 날개 죽음을 재촉하니 / 슬피 울며 해마다 깊은 못을 그리워하네.”(‘籠鶴’) 고단한 삶의 끝에 이미 죽음을 내다보고 있다. 다음 시 역시 그 애절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병들어 빈 방에서 본분 지키며 / 가난과 추위 속에 사십 년일세. /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 가슴속에 시름 맺혀 옷 적시지 않은 날 없네.”(‘病中愁思’)

이후 매창과 유희경의 극적 해후가 이루어지나, 35세의 매창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얻은 때였다. 1607년, 63세의 노인이 된 유희경은 당상관이 되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열흘 머물며 다음 시를 쓴다. “내가 꽃향기를 찾아옴만 아니라 / 열흘간 만나 시 읊자던 말 따르는 것이라오.”(‘重逢癸娘’ 일부) 여기에는 옛날의 운우지정을 되살리려는 만남만이 아니라 오직 시를 논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딴전을 피우는 촌은의 속내도 엿보인다. 이후 기약 없는 이별을 하였고, 3년 후 38세의 매창은 생을 마감한다.

선조의 승하로 국상(國喪) 준비 등으로 바빠 병문안도 하지 못했던 촌은은 매창이 이승을 떠나고 3년이 지난 뒤에야 부안으로 내려와 그녀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였다. “향기로운 넋 홀연 흰 구름 타고 가니 /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 배나무 정원에 노래 한 곡 남아 있으니 /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悼玉眞’) 여기서 ‘옥진’은 양귀비를 말하는바, 양귀비에 빗대어 매창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매창 시는 오로지 한 남자를 애타게 그리는 연정의 시에서 그치지 않는다. 말년의 시에서 그는 임의 부재에서 오는 현실세계의 아픔을 내세 또는 이상세계로 확장하여 사랑의 완성 단계로 승화시킨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현실을 매창은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허균의 평소 충고대로 불가(佛家)의 세계 또는 선계(仙界)를 찾아 나선다. 다음은 장시(長詩) ‘선유’(仙遊)와 ‘등월명암’(登月明庵)의 끝부분이다. “술잔을 들고 연달아 주고받지만(臨盃還脈脈) / 날 밝으면 각기 하늘 끝에 가 있으리.(明日各天涯)”,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客心怳若登兜率) / 황정경을 읽고 나서 적송자[신선]를 뵈오리라.(讀破黃庭禮赤松)”

매창은 이미 현실을 초월하여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지고지순한 매창의 연가. 여든이 넘은 촌은의 다음 시가 있기에 매창은 더욱 편안히 잠들 수 있으리라. “매화를 마주하며 읊조리는 것으로 만족하나니(獨對寒梅吟詠足) / 이 늙은이 머물 곳으로 이곳이 마땅하리.(老夫棲息此中宜)”[‘雪中賞梅’ 일부]

긴 세월 수절하며 자존감을 지킨 매창의 시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길이 빛을 발할 것이다. 매창의 창작으로 확실하게 고증된 시조로는 아쉽게도 한 편만 전해오고 있으나 심금을 울리는 절창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괘라.”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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