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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시인 박형진 씨 “과잉기술의 시대,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지속가능한 삶은 더 멀어진다”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 씨 “과잉기술의 시대,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지속가능한 삶은 더 멀어진다”
  • 김은정
  • 승인 2019.08.08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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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진 시인이 부안군 변산면 모항 자택 마루에 앉아 부채를 부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박형진 시인이 부안군 변산면 모항 자택 마루에 앉아 부채를 부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부안군 변산면 변산로. 아름다운 해변 마을 ‘모항’에 있는 시인의 집을 찾았던 것은 10여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다. 두 번째 산문집 ‘모항 막걸리 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를 펴낸 직후였는데 그는 이 책 때문에 마음고생을 단단히 겪고 있었다. 그가 나고 자란 모항과 그곳 사람들이 살아온 그만그만한 이야기를 담은 이 산문집이 나오면서 더러는 감추어두고 싶었을 이야기 속내가 들춰지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적잖은 입담이 오고간 후유증이었다.

‘꽁댕잇배에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태우고 고기잡이 나섰다가 밤썰물에 밀려 삼대가 몰살한 갑열씨, 아들딸 낳고는 어쩐 일인지 3년을 폐인으로 지내다 요절한 자맥질 선수 종태씨, 어릴 때 하도 울어싸 아버지가 포대기 채로 내팽개쳐 실성해버린 고막녀, 오징개 양반이 바람피우다 들킨 사연, 남의 배를 타면서 받은 삯을 조금 때 술집에 붙어살며 술로 다 먹어조져버린 조지기, 눈을 끔쩍이는 버릇 때문에 남자를 줄포장에서부터 뒤따라오게 한 눈끔쩍이, 술 마시고 조갈증으로 오강 단지 안 오줌을 다 마시고도 사람들이 왜 웃는지 모르는 공진씨’ 등 더도 덜도 아닌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꼭 그대로 펼쳐놓은 산문집의 이야기는 재미와 애틋한 감동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끌어 들였지만 시인은 외레 마을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겼다는 것에 마음 아파했었다.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씨(61) 이야기다. 꼭 19년 만에 시인의 집을 다시 찾았다. 그동안 시집과 산문집, 어린이 책을 꾸준히 내놓았던 그는 최근 네 번째 시집 <밥값도 못 하면서 무슨 짓이람>(천년의 시작)을 펴냈다. 소설가 정도상의 표현처럼 ‘농부이며 동시에 시인인 상태로 노동하는’ 시인의 삶이 궁금했다. 덧붙이자면 3년 전 자칫 도감과도 같은 성격이 될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맛깔스런 글로 버무려 내놓은 훌륭한(?) 산문집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열화당)도 좀 더 듣고 싶었다.

짙푸른 나무가 빽빽하게 놓인 산길을 따라 들어간 그의 흙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한때는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투쟁가였으나 강하지 않고 요란스럽지도 않은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맞게 더 찬찬하고 겸손해진 듯 했다.

그가 즐겨 마시는 줄포막걸리와 방금 쪄낸 옥수수가 마당 한쪽 평상위에 놓였다. 더위가 한창인 한 낮, 한가해진 농사꾼 시인과의 인터뷰는 예상보다 길게 이어졌다.

 

-들어오면서 보니 밭에 작물은 별로 보이지 않고 풀이 잔뜩 깔려 있던데요.

“그것이 눈에 띄었군요. 올 한해 땅을 놀렸어요. 농사짓기 싫어서…….”

-농사짓는 시인이 농사는 짓지 않고 시만 쓴다는 이야기겠습니다.(웃음)

“이야기 하자면 긴데, 완전히 놀리진 않고 그저 우리 식구 먹을 만큼만 땅을 빌렸습니다.”

- 농사는 얼마나 짓습니까.

“소규모예요. 집 앞 밭은 천 오백평정도, 일곱 마지기 조금 넘고 논은 천이백 평, 한 필지 짓습니다.”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수입은 어떻습니까.

“1년 수확하는 쌀이 알곡으로 2000kg 정도인데 가격으로는 형편없어요. 유기농을 하고 있는데다 농기계가 없으니 농사를 지으려면 트랙터 콤바인 이앙기 등 기계를 임대해야 하고 거름까지 모든 경비를 제하고 나면 250만 원~300만 원 정도 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식구가 1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유기농 쌀은 비싸니까 일반미를 다시 사서 먹어요. 우스운 일이죠.”

-유기농으로 열심히 지은 쌀은 내놓고 일반미를 사서 드시는 이 상황이 농촌 현실이겠네요.

“밭농사는 유기농이 더 힘들거든요. 풀을 일일이 앉아서 뽑아야 하니까요. 가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한 살림이나 생협 등 관련 단체와 계약재배를 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시중에 내기 어렵죠. 저 같은 경우는 결국 나누어 먹거나 자가소비 합니다.”

-유기농으로 전환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제가 농사일에 게을렀어요. 풀을 매는 것도 그다지 열심히 하는 체질이 아니어서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풀매는 일로 야단을 많이 맞았죠. 결혼 전부터 농민운동에 참여하면서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결혼 하고 난후 정농회에 있는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유기농 쪽으로 가게 된 것 같아요.”

-유기농을 한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잖아요. 일상적으로 해왔던 것들 무심히 해왔던 것들을 챙겨야 하고…….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지지난주 금요일에 집을 나가 엿새 동안 고창 영광 함평 무안 신안 목포까지 230km를 걸었어요. 길가의 논밭을 보니 유기농을 하는 곳은 확실히 표가 나더군요. 특히 함평 쪽으로는 유기농 땅이 많았어요. 요즘의 농촌이 어떻습니까. 인구가 줄어드니 폐가가 많고 논밭은 단정하지 않죠. 또 놀란 것은 농촌 구석구석까지 뒤범벅되어 있는 쓰레기 더미였어요. 보이는 것은 논둑이든 밭둑이든 풀 약을 친 탓에 벌겋게 타있고. 가슴 아팠습니다. 유기농 하는 사람들은 절대 풀 약을 하지 않아요. 풀이 자랄 때까지 기다려 깔끔하게 깎아주죠. 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풀 약으로 벌겋게 타고 메마른, 모래 먼지만 풀풀 날리는 숨도 못 쉴 것 같은 이런 땅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풀의 생리나 작물의 생리를 잘 알게 되면 그렇게 죽자 살자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유기농을 하면 숨통이 트여요. 이번에 돌아보니 더 확연히 알겠더라고요.”

-멀찌감치 떨어져 보게 된 땅이 많은 것을 다시 확인시켜준 것 같습니다.

“농약을 안 한 논과 밭을 지날 때는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어요. 푸름이 살아 있고. 우렁이가 알을 낳아 놓고. 그런 것을 보니 풀과의 전쟁이나 노동의 어려움을 떠나 결국은 유기농사가 힘들기는 하지만 자연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충분히 보상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이죠. 나를 떠나 우리 이웃을 살리고 나아가 흙과 물을 살리는 일이 되니 어렵고 힘든 일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유기농의 힘은 더 넓게 봐야 해요.”

-3년 전쯤 펴낸 연장 이야기 산문집은 선생님이 농사일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책이더군요. 어떻게 쓰게 되었습니까.

“간단합니다. 소중한 것들이 다 사라지잖아요. 사라진다는 것은 구시대 유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인데, 갈수록 고령화되는 농촌에서는 연장과 기계의 문제가 더 절실합니다. 옛날 부지런한 가장이 있는 집 괭이나 호미는 결코 녹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다 녹슬어버린다는 것은 수공업적인 농촌의 문화나 농촌의 생활양식이 다 없어진다는 이야기거든요. 그것이 안타까웠어요. 또 하나. 넘쳐나는 오늘의 과잉 기술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몇 평 되지 않은 텃밭은 괭이나 호미로 하면 되는데, 그마저도 트랙터가 들어가 한단 말이죠. 그런 과정이 일을 좀 편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재화의 흐름으로 보면 결국은 모두 농기계회사나 거대 기업들에 돌아가는 잇속이에요.”

-선생님은 농사지을 때 거의 연장을 쓰십니까.

“저도 형님들이 주신 경운기 한 대와 관리기가 한 대 있어서 쓰긴 합니다. 그러나 적정기술로 보자면 저 같은 소농의 경우는 이정도면 충분한데 농사일이 꼭 그렇게 되진 않거든요.”

-적정기술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인가요.

“과잉 기술이 아닌, 쓸모 있는 만큼만 쓰는 것이죠. 적정기술의 뒷면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대기업이 갖고 있는 농기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그런 인식. 결과적으로는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배경이죠. 최소한의 동력을 이용하는 것, 그것이 적정기술인데 그 지향은 지속가능함에 있습니다.”

-얼마 전 다녀오셨다는 도보여행은 어땠습니까.

“생애 처음 몇 십 년 만에 벼르고 별러 다녀온 여행이었어요. 젊은 시절, 농민운동 할 때는 직책까지 맡았으니 날마다 나돌아 다녀야 했지만 여행이라고 할 수 없었죠.”

-맘먹고 가셨군요.

“45년 농사일을 했는데, 이 밭이 고스란히 그 시간을 함께 해온 밭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돌아보니 해마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거예요. 봄 되면 감자 심고 고추 심고, 여름 되면 고구마 참깨 콩 심고. 규모가 크면 다른 것을 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규모가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일도 없거든요. 지금은 대부분의 작물이 단지화가 안되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의 농사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저 같은 소규모 농작인 경우는 결국 재래식 농사 밖에 할 수가 없는 것이죠. 45년 농사를 지었다는 것은 해마다 똑같은 농사일을 45년 동안 되풀이 했다는 것인데 명색이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쓰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반복되는 일들이 너무 지겨워졌어요. 부끄러운 일이긴 하나. 그런 생각이 갈수록 더 큰 괴로움을 주더군요.”

-그렇게 생애 처음 떠난 여정에서 뭘 얻으셨습니까.

“뭘 꼭 얻겠다고 떠난 길은 아니었으니 욕심은 없었어요. 시를 몇 편 써오긴 했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자기애가 강하고 독립심이 없었어요. 가족들과도 마음의 일체감이 없어졌다 생각하면 너무 괴롭거든요. 그래서 항상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나쁜 방식은 아닌데 자칫하면 집착이 되거든요. 이번 여행에서는 무작정 걸었어요. 조금 더 걸어 해남 땅 끝까지 갈 계획이었는데 변산공동체 학교에서 연락이 와 그날 저녁 돌아왔습니다. 엿새 동안 하루 35km나 40km를 죽자 살자 걸었어요.”

-잘 다녀오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세상을 만나신 셈인데요.

“다른 태도라기보다는 다른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이죠. 60년 살고 보니 모든 것이 바닥이 나버린 것 같은, 무엇인가 다시 새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갈등 같은 것.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제적인 부분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계속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일상은 견딜 수 없었어요. 길들여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겠죠. 고행과도 같은 여정에서도 밝게 정리되는 몇 가지가 있었어요. 여행의 끄트머리쯤이었는데 더 이상 걷기 힘들어진 거예요. 더 이상 못 걷겠다 싶어 면사무소에 들어가 농가 비닐하우스나 정자 같은 쉴 자리를 물었죠. 이슬만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면사무소 뒤편 일하시는 분들 쉼터를 안내해줬어요. 그때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라 어떤 깨우침이 확장되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삶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죠. 그리고 덧붙이자면 정신의 자유랄까. 농사일에 매달린 삶이라도 어떻게 하면 정신의 자유를 가져올 수 있겠는지 길이 보여요. 좀 더 자유롭게 농사를 대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시 이야기를 해보죠.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농사지으면서 시를 쓴다는 것은 확실히 특별한 일인데요.

“특별한 계기라면 신동엽 시인의 시를 만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데, 우여곡절 끝에 열여덟 살 즈음 서울에 올라갔어요. 박정희 정권시절이었는데 날마다 데모와 시위가 이어졌죠. 아는 분을 통해 운동권 누나를 알게 되었어요. 덕분에 그 시절 여기저기서 열리는 교양강좌를 많이 듣고 다녔어요. 그 누나가 신동엽의 <금강>이라는 시집을 소개해주면서 시를 모두 베껴 가져다주더군요. 세권의 스프링노트였는데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금강 중에서도 6장 시작 부분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았어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자‘ 는 그런 내용인데,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와 온갖 비리를 압축적으로 담아 놓은 시였어요. 지금 읽어봐도 그 감동이 전혀 퇴색되지 않는 시죠. 그 부분만 10부를 베껴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어요. 그러면서 나도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신동엽의 금강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군요.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처럼 분단의 문제를 일관되고 정서적으로 그리고 올곧게 다룬 시가 또 있을까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다운 시잖아요. 거기 비추어보면 농민의 모든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과연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말미에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굳이 가리자면 선생님은 농사꾼과 시인, 어느 쪽인가요.

“어려운 질문인 것 같으면서도 간단합니다. 농사꾼이 아니었으면 시인이 못되었을 겁니다. 지금도 저를 시인으로 부르면 내 몸에 맞지 않는 옷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랫동안 농사지어온 농사꾼의 정체성으로도 걸맞지 않고 시인으로서도 자리매김 될 만큼의 좋은 시를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분명한 것은 농사꾼으로서 겪게 되는 괴로움이나 갈등을 그래도 의연하게 견뎌왔고, 또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 북받쳐 오르는 것들이 있어 그것이 자연스럽게 노래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의 시간이 그려집니다. 더 건강한 농사꾼으로 돌아온 시인을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제 시집에 ‘칠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딘가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내 발에 혹은 내 입속에 콩잎 깻잎 이런 것이 돋아나올 때면 내가 정말 제대로 된 농사를 다시 하고 싶다면 칠석에 내린 비 같이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에요. 그런 시간을 곧 마주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된 농사를 지으면서 제대로 시대를 담는 그런 시를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 [박형진 시인은] 10여 년 농민운동…고향 부안서 대안학교 교장도 맡아
 

박형진 시인(61)은 부안군 변산면 모항이 고향이다. 열여덟 살 즈음 잠깐 서울로 가서 지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집에서 15km나 떨어져 있는 읍내 중학교에 다니기 싫어 세 번 가출 끝에 목적을 이뤘지만 형들의 채근으로 서울의 피어선 공립학교를 한 달 남짓 다니다 그 마저도 작파하고 내려왔다. 7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그를 어머니는 특별한 애정으로 키웠다. 아홉 살 늦깎이 나이에 초등학교 입학한 것도 어머니가 품에서 아들은 떼놓지 못한 탓이었다. 여덟 살 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 저녁이면 마실을 다녔던 그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온갖 재밌는 이야기를 귀에 쏙쏙 박히도록 들었는데, 그의 산문과 시가 푸진 어투와 재미를 갖게 됐다면 그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책읽기에는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는데, 그즈음 문맹퇴치를 내세워 마을에 야학당이 생기고 마을문고가 문을 열었다. 덕분에 원래 서당이 있었던 그의 집에 마을문고가 들어섰다. 그때 동네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던 삼국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다섯 권씩 20권 세트로 구성된 현대문학 100권을 거의 다 읽었다. 잊고 있었던 그 소설들은 문학을 알게 되고 시를 쓰게 되었을 때 책읽기에 빠져 있었던 어린 시절을 소환해냈다.

농사일을 배우고 있던 열여덟 살, 반란이 시작됐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학교 강의록을 사서 공부 했지만 영어 수학이 그의 의지를 붙잡았다. 공부를 다시 하겠다며 서울로 갔다. 그즈음 서울 각 공간에서 운영하던 교양강좌를 찾아다니며 지식을 넓혔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운동권 누나 덕분에 자신을 시인으로 이끈 신동엽시인의 시 <금강>을 만났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꾼이 된 것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했다.

20대와 30대를 거치면서 농민운동은 중요한 사명이 되었다. 기독교농민회 전라북도 총무를 맡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던 그는 다른 방법으로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과감히 15년 농민운동과 결별했다. 그때부터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시도 열심히 썼다. 1992년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이 됐다.

철학자 윤구병 교수가 주도한 변산공동체를 만드는데도 참여한 그는 세 딸과 아들을 모두 변산공동체 학교에서 교육시켰으며 지난해에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공동체 대안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첫 시집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가고>를 비롯한 네 권의 시집과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 등 세권의 산문집, 그리고 <갯마을 하진이>와 <벌레 먹은 상추가 최고야>등의 어린이 책을 펴냈으며 그중에서도 <연장 부리던 이야기>는 88가지 연장 이야기를 통해 사라져가는 농촌의 생활문화와 양식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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