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08-23 17:12 (금)
"군산 내 일제 전쟁 흔적, 역사 교육 현장으로 삼아야"
"군산 내 일제 전쟁 흔적, 역사 교육 현장으로 삼아야"
  • 문정곤
  • 승인 2019.08.12 2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군산시는 일제강점기 수탈과 아픔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교육의 현장으로 물려주기 위해 일제시대 건축물 등을 활용,‘시간여행축제’등 관광 상품으로 발전시킨 대표 도시이다.

이처럼 일제 수탈과 저항의 도시 군산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 등 근대건축물 뿐만 아닌 일제가 전쟁을 위해 만든 군사시설도 상당수 존재한다.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에 따르면 일제는 폐망 직전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군산지역을 군사시설화 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시설은 군산지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9년 옥구읍 옥정리 할미산(석갈산石喝山) 중턱에서 발견된 일본군 진지(토치카)
2009년 옥구읍 옥정리 할미산(석갈산石喝山) 중턱에서 발견된 일본군 진지(토치카)

대표 시설로 2009년 옥구읍 옥정리 할미산(석갈산石喝山) 중턱에서 발견된 진지(토치카) 2곳과 진지를 지키던 일본군이 중대본부로 사용한 벙커를 비롯해 미룡리 용둔마을, 원당마을 등에서 발견된 다수의 군사용 벙커들이다.

콘크리트 구조물(두께 30cm이상)로 지어진 진지와 산 속에 굴을 파 만든 벙커들은 일본군이 1934년 지은 군산비행장(현 미공군비행장) 내 주둔한 육군항공대(가미카제 1개 중대 및 다쓰하라 비행학교)를 방어하고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한 이른바 ‘결 7호 작전’에 따라 1945년 3월 옥정리에 주둔한 일본군 1개 중대가 구축한 시설이다.

원당마을에서 발견된 군사용 벙커
원당마을에서 발견된 군사용 벙커

특히 미룡동 신관리 원당마을에 만들어진 벙커는 해방 후 6·25전쟁 때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미제면 신촌리 64명 사망)’ 장소로 사용된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은 진지와 벙커 구축을 위해 옥정리 거주자 가운데 45세 이상 18세 이하 부녀자들을 동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진지 구축에 부녀자와 특정 연령층이 동원된 이유는 당시 18세 이상부터 45세 이하 남자는 모두 태평양 전쟁에 징용됐기 때문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복수의 주민에 따르면 이러한 진지와 벙커는 옥정리부터 신관동 원당마을을 거쳐 지금의 산북동 동아아파트 산자락까지 이어진다.

이를 놓고 볼 때 일본군은 쌀을 본국으로 수탈함은 물론 태평양 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용 쌀 반출의 전략적 요충지인 군산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군산대학교를 기준으로 옥정리, 미룡동, 산북동 일대에 광범위한 방어선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현재 군산대학교 기숙사가 들어선 곳은 일본군이 수류탄 투척 및 총검술 등 전투훈련장으로 사용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원당마을에 거주 중인 홍천의 씨(84)는 “일본군 벙커는 원당마을에만 15개 정도가 구축됐는데 지금은 각종 개발 등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2곳만 남았다”며 “당시 마을 부녀자들이 벙커 구축을 위해 부역에 동원됐고, 타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끌려왔으며 지금의 군산대 기숙사 자리에서는 매일같이 전투훈련을 했다”고 회상했다.

이복웅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은 “군산은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위한 전진기지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용 쌀 반출의 전략적 요충지였다”며 “이러한 군사시설을 발굴·복원해 후손들에게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74년 만에 다시 시작된 일본의 경제 침략에 대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