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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과 호남삼걸(湖南三傑)
선비정신과 호남삼걸(湖南三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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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13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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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회 선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구사회 선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선비’는 지식과 인격을 함께 갖춘 사람이다. 한편으로 직분을 갖고 벼슬을 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옛날에 선비는 때를 만나면 임금을 도와 국정에 참여해서 봉사를 하였다. 반대로 자신의 뜻이 시대와 맞지 않으면 조용히 물러나서 수양하며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살았다. 이 과정에서 선비는 불의에 맞서 저항하고 시대를 바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 의식을 본분으로 삼았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선비정신’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의 존망에 처한 시기에 빛을 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나라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구한말에 호남 지성을 대변했던 ‘호남삼걸(湖南三傑)’을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그들이다.

이들 세 선비는 성향이 달랐지만 서로 친교를 나누던 사이였다. 몇 차례 함께 만난 적도 있었다. 석정 이정직은 말년에 고향인 김제에 칩거하며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면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시문과 서화를 시작으로 경학과 역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서양 철학에도 관심을 보여 칸트 철학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석정은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이곳 전북 출신의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을 거치며 그의 학문과 예술은 근대 전북의 문화적 자양분이 되었다.

반면에 같은 김제 출신의 해학 이기는 일제에 항거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실천적 지식인의 모범을 보인다. 그는 민중을 일깨우기 위해 『호남학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계몽에 힘썼다. 그러다가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자 해학은 열정적으로 구국 투쟁의 길로 나선다. 이 과정에서 해학은 피로와 굶주림으로 객지인 서울의 이름 없는 여관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한편, 매천 황현은 살고 있던 구례에서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그는 시문으로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드러내며 일제 침략을 고발하며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매천야록』을 통해서는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낱낱이 기록하여 후세의 귀감을 보였다. 그리고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그는 유언으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분명히 하였다.

이들 호남삼걸은 하나같이 시대를 고뇌하며 암울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1910년을 기점으로 모두 삶을 마감한다. 이들 세 사람은 삶의 방향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선비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매천은 나라가 망하자 자결로써 선비정신의 면모를 보여준다. 해학은 일제 침략을 막기 위해 부지런히 국내외를 넘나들며 선비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었다. 석정이라고 나라 걱정이 없었겠는가. 석정은 향리에서 학문과 예술을 연마하며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시름시름 앓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 마디로 이들 호남삼걸은 일제 침략이라는 국난을 처해 현실을 고발하거나 저항하였다. 또는 석정처럼 교육을 통해 조국의 앞날을 대비하였다. 이들 호남삼걸은 서로 행방이 달랐지만, 당대 호남을 대변하는 참다운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사회 (선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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