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08-22 01:18 (목)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⑦ 김삼의당의 시 다시 알기 : 남원 출생, 진안으로 이주한 김삼의당 … 조선후기 여류문학의 꽃 피우다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⑦ 김삼의당의 시 다시 알기 : 남원 출생, 진안으로 이주한 김삼의당 … 조선후기 여류문학의 꽃 피우다
  • 기고
  • 승인 2019.08.13 22: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같은 날 같은 마을 태어난 담락당 하립과 결혼, 평생 빼어난 화답시 나눠
평범한 시골 아낙, 간고한 삶을 유교의 도와 시창작 정신으로 승화
남원 생활의 연정시, 진안 이주 후 생활시, 전원시 불후의 시로 남아
김삼의당 부부 초상화(진안 마이산의 명려각 소재)
김삼의당 부부 초상화(진안 마이산의 명려각 소재)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은 10월 13일 남원의 서봉방(교룡산 서남 기슭)에서 연산군 때 학자 김해김씨 탁영 김일손의 후손 김인혁의 딸로 태어났다. 쇠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김삼의당은 『삼의당 김부인 유고』 「자서(自序)」에서 “일찍이 언문으로 소학을 배웠으며, 미루어 문자를 통하고 제가(諸家)를 간략하게 섭렵하였다.”고 밝혔으니, 중국의 시문집을 비롯하여 경서와 사기를 두루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남원 교룡산공원 김삼의당시비
남원 교룡산공원 김삼의당시비

18세에 삼의당은 태어난 연월일이 동일한 같은 마을의 담락당(湛樂堂) 하립(河)(1769-1830)과 결혼했다. 하립은 세종조 영의정을 지낸 진양하씨 경재 하연의 12대손이다. 기이한 인연에 두 집안 모두 쇠락한 사대부 집안이었으니, 둘은 누가 봐도 천생배필이었다. 혼례를 치른 밤 담락당이 한시 두 수를 읊었고, 삼의당 역시 두 수를 지어 화답하였다. 그들의 신혼 시 한 수씩만 들어본다.

출생지 남원 유천마을의 김삼의당 신혼시비
출생지 남원 유천마을의 김삼의당 신혼시비

“우리 모두 광한전 신선으로 만나(相逢俱足廣寒仙) / 오늘 밤 분명 전생 인연 잇는구나.(今夜分明續舊緣) / 우리 만남 원래 하늘이 정해준 것이니(配合元來天所定) / 속세의 중매는 그저 꾸며진 일이라오.(世間媒妁摠粉然)”(담락당) “열여덟 선랑과 열여덟 선녀(十八仙郞十八仙) / 신방에 화촉 밝히니 우리 인연 좋아라.(洞房華燭好因緣) / 같은 해 같은 달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으니(生同年月居同閈) / 오늘 밤 우리 만남 어찌 우연이겠습니까.(此夜相逢豈偶然)”(삼의당)

김삼의당은 가난의 시련 속에서도 담락당을 향한 다수의 연정시를 남겼고, 유학을 바탕으로 한 생활시, 초연한 자연친화의 시를 통해 조선후기 여류문학의 꽃을 피워 올렸다. 삼의당은 250여 수의 시 외에도 20여 편의 산문을 남겼다. 그의 시는 필사본과 간행본으로 전해오는데, 간행본은 나중 것으로 자의적 편집이 많이 이루어져 훼손이 심해졌다. 필사본 역시 정본 자체를 필사한 게 아니고 간행본보다는 훼손이 덜 되었다.    

담락당은 부인에게 ‘삼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었다. 삼의당이 거처하는 집 정원에 군자를 상징하는 대나무, 소나무 등을 심어 평생 충효의 뜻 속에 살아갈 여인임을 시로 읊었고, 삼의당도 담락당 형제들의 효제와 충의가 가득하다고 응수하여 신의에 찬 부부임을 과시하였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으나, 담락당 오형제들은 모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한시 창작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혼례 후 삼의당이 이루고자 한 가장 큰 일은 남편의 과거급제였다. 당시 담락당은 누가 봐도 준수한 인물이었고, 몰락한 양반가를 다시 일으킬 인물로 여겼다. 20세에 남편의 등과를 위해 서울로 보낸다. 그 결과 삼의당 부부는 떨어져 지내는 기간이 길었고, 삼의당은 남편의 영달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칼을 자르고 비녀를 팔아 남편의 생활 자금을 마련하는 등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독수공방의 긴 세월 삼의당은 시를 읊으며 삶을 추스린다. “인적 없는 사창에 날은 저물고 / 꽃은 떨어져 가득한데 문은 닫혀 있네. / 하룻밤 상사의 고통 알고 싶다면 / 비단이불 걷어놓고 눈물 자욱 살펴보오.” 감정이 고조된 시 외에도 정밀감이 높으면서 규방의 한을 형상화한 작품도 보여준다. “맑은 밤에 물을 길러 갔더니 / 밝은 달이 우물 속에서 떠오르네. / 말없이 난간에 서 있으니 / 바람에 흔들리는 오동잎 그림자” 물을 길러 갔다가 우물 속의 달이 임의 얼굴로 보이고, 흔들리는 오동잎 그림자를 또 다시 임인 양 착각하는 상사의 마음이 깊은 울림으로 전해온다.
십여 년의 공부에도 등과를 못하자 1801년 담락당은 삼의당에게 진안 마령 방화리로 거처를 옮겨 농사짓자는 제안을 하게 되고, 삼의당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그는 남편과 더불어 농사짓는 평범한 아낙의 삶을 영위한다. 입신양명의 꿈을 내려놓으니 그들 부부의 진면목은 오히려 평범함 속에서 꽃을 피운다. 삼의당은 농사에 부지런하면서도 전원생활을 무척 즐겼다. “나란히 선 초가집들 마을을 이루었는데 / 뽕밭 삼밭엔 가랑비 내리고 문은 닫혔네. / 마을 앞 복사꽃 흐르는 물에 떠가니 / 이 몸이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것 같네.”

마이산이 멀리 보이는 땅에 삶의 터를 잡은 담락당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한양에서 공부하면서 8년 동안 일만여 권의 장서가이면서 순조 때 영의정,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두실 심상규의 집에서 유숙했기에 학문적으로 박학다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진안으로 옮겨온 뒤에도 그는 시험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42세가 되어서야 향시(鄕試)에 붙었고 다시 회시(會試)를 보러 한양으로 가지만, 결국 낙방했다. 그의 『담락당집』에는 다수의 시문이 실려 있고, 시의 대부분은 낙향해서 달관한 태도로 자연을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그들 부부가 주고받은 시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확인된다.

“초당의 사면 풍연(風煙)이 좋으니 / 인생 말년에 시서(詩書) 읽으며 천성을 즐기노라. / 어찌 구구하게 하고 싶은 것 구하리오. / 이 한 몸 편하게 거처하니 신선이 따로 없네.”(담락당) “노을빛은 비단을 이루고 버들은 연기 같으니 / 이곳은 인간세상이 아니고 별천지라네. / 서울에서 십 년 동안 분주했던 나그네 / 오늘은 초당에서 신선처럼 앉아 있네.”(삼의당) 담락당 시의 각운 ‘煙, 天, 仙’에 차운하여 삼의당이 화답하였다. 자그마한 땅을 일구며 마음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자의 일상적 안분지족이 바로 별천지 삶이라는 것을 주고받고 있으니, 자고로 우리 땅에서 인고의 세월을 시로 달래며 극복하고 나아가 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부부 시인이 어디 있었던가.

정우봉은 삼의당의 한문 산문을 삼엄(森嚴), 비측(悲惻), 한아(閑雅)의 세 풍격으로 구분했다. 세 가지 예를 간단히 살펴본다. 삼의당이 쓴 ‘예성야기화(禮成夜記話)’에는 혼례를 올린 날 밤 담락당과 나눈 대화가 전해온다. 삼의당이 화답시로 “종신토록 낭군의 뜻 어기지 않으리.” 하고 읊은 뒤의 대화다. 담락당이 “종신토록 낭군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남편에게 과오가 있더라도 따라야 합니까.”라고 하였을 때 삼의당은 말한다. “부부의 도는 오륜을 겸합니다. 아버지에게는 간언하는 아들이 있고 … 제가 남편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남편의 과오를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겠습니까.”

삼의당은 상호 존중과 대화, 논쟁과 비판을 통해 상대의 과오를 지적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도덕규범을 주장하였다. 여성으로서의 주체의식이 분명하였고, 그 근본에는 남녀평등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페미니즘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진양하씨오효자전’에서 삼의당을 평하기를 “허난설헌과 이옥봉이라도 이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의리처에 있어서는 글의 기운이 삼엄하였으니 실로 사내라도 미치기 어려운 바가 있었다.”고 하였다.

돌도 되기 전 셋째 딸이 죽었을 때 27세 삼의당은 “오래 살면서 착하지 못한 것보다는 일찍 죽는 것이 더 낫다. … 나는 네가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슬픔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반어법을 사용한 이 표현은 글 전체를 관통하면서 화자의 슬픔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또한 진안으로 거처를 옮긴 후 담락당이 남원의 옛집을 방문할 때는 “교룡산 아래는 우리 옛집입니다. … 아아, 이제는 다시 얻을 수 없으니, 당신이 저를 대신해 이러한 풍경들을 묘사하여 하나하나 내 책상 위에다 불어오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부탁한다. 이렇듯 삼의당은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까지 풍부한 성과를 남겼다.

시로써 마음을 수양하며 살아온 삼의당은 군자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비애감을 유교의 성리를 바탕으로 한 실존적 자각과 시 창작을 통해 극복하였고, 마침내 달관적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평범한 시골 아낙 김삼의당은 일상 속에서 유가(儒家)의 진정한 세계를 시화(詩化)한 탁월한 여류시인이었다. 진안군 백운면 원덕마을에 고이 누워 있는 삼의당 부부를 위하여 시 한 편 읊는다. “많은 비 내린 삼월이라 / 앞 시내에 비로소 물이 흐르네. / 언덕의 꽃들은 나비를 불러오고 / 물가의 버들은 꾀꼬리를 품었어라.”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