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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시인, 정윤천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 : 서정시의 갱신 구현, 지리산 문학상에 빛나는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시인, 정윤천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 : 서정시의 갱신 구현, 지리산 문학상에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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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1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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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시인을 처음 보았던 때를 떠올린다. 모색이 짙어가는 복분자주 공장 안 술 탱크들이 기마병처럼 열병식을 하고 있었다. 알싸한 술 향기의 궁륭 속으로 그때 이미 필자는 해동성국 발해의 희미한 기척 가까이를 통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기억을 한 단계 더 소환하자면, 시인은 골계와 해학을 곁들인 입담으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했던 것 같다. 복분자 사업이 맘대로 잘 안 된다는 말도 들은 것 같다. 최근 “앞으로 추락이나 암흑 같은 시간들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인터뷰 기사를 접하며 ‘지리산 문학상’으로 돌아온 시업의 길 위에서 수많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생활의 멍에에 자유롭지 못함을 짐작케 해주었다.

표지 글에서 만난 이경림 시인은 “어머니의 죽음과 멸망한 발해를 동일시 가족사에 얽힌 고단함, 장삼이사들의 이야기, 당대 현실의 모순들을 각각의 시적 발화가 애잔하고 탁월한 지점으로 이끈”다고 평가했다.

필자 또한 소멸하고 퇴락한 것들이 불가역의 시공간을 넘어 현재화된 추억으로 사람들을 위무하고 있음을 시인의 새 시집에서 발견한다. 비장의 멸망서사가 숭고미의 역설적 인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즉 시의 매혹에 치환되는 명징한 논거는 따로 말해야 되겠지만 인과율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시 속에 담겨 있다. 필자가 사숙하는 그의 작품들은 불규칙한 나열과 회고적 성격이지만 과잉되어 낭비되는 구절이라곤 없다. 낯익은 고백체적 발화형식을 쉽게 취하지 않으면서도 일상이나 설화, 상상 속 매제 등의 여러 층위가 필연성으로 연결된 시적 질감은 편편이 낙차를 느낄 수 없는 지점에 가 있다. 묘사와 전언, 추억과 현실의 교차편집을 통한 어머니의 제유인 발해는, 멸망서사가 아닌 추존하고 확대재생산 되는 현재성을 입었다. 한편으론 ‘서정시의 갱신’이라는 뜻밖의 위업마저 달성한 듯 보인다.

정체성 혼란이거나 태생적 그리움에 떨어야할 때. 잠시 <발해로 가는 저녁>에게로, 아니 정윤천 시인의 새 시집에 기대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눈빛만으로도 심연에 닿아 병증을 헤아리는 편작의 시편들 같았으니! 화려한 빛으로 세계를 전복시키거나 미학적 수단들을 애쓰며 차용하지 않고도, 시인의 언어 탐구는 충분히 아름답다. 시인의 말처럼 “불우의 기억들이 시의 얼룩들로 찾아”와 있었기에, 그는 어쩌면 “온몸으로 살아낸 자리에 씀바귀 꽃”을 피워낸 것인지 모른다.

늡늡하고 유장하게 저류하고 있는 중의법적 관점(유종인의 해설)에서, 그의 시 발해의 환생은 국가와 개인이라는 대칭적인 상관성을, 쇠락하는 존재의 숙명적인 비유로 환원해 내기까지 이르렀다. 시집 속의 시들은 대부분 “발해”처럼 깊고 멀고 슬프고 아름답다. 10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시인은, “시인은 일단 가오가 서야 한다”며, 반골의 카랑카랑한 눈빛을 세상에 쏘아올리고 있을 듯하다. /기명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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