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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문신 시인 - 박형진 시집 ‘밥값도 못 하면서 무슨 짓이람’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문신 시인 - 박형진 시집 ‘밥값도 못 하면서 무슨 짓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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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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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의 저녁은 이렇게 한 편의 시로 내린다

모항에 저녁 내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이런 물음에 저녁에도 소리가 있는지, 저녁은 내리는 것인지 되물을 법도 하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해줄 수 있으리라. 저녁은 하늘이 세 뼘쯤 가라앉는 순간이고, 그 순간에 하늘 그늘이 성큼 우리의 이마를 내리누르게 되고, 하늘 그늘과 우리 이마가 서로 닿는 순간, 귀썰미 밝은 사람들에게는 저녁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오래 전, 노을 붉게 드리우던 날 모항에서 들었던 그 소리를 거의 십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박형진 시인이 보내온 시집 <밥값도 못 하면서 무슨 짓이람>을 읽다 보면, 매일 저녁 그 빛과 무늬를 달리하는 모항의 저녁과 만나게 된다. 모항의 저녁은 이렇게 한 편의 시로 내린다. 이를테면 이런 소리다. “저 꽃을 찢지 마라-//저 꽃을 찢지 마라-”(‘시로 쓴 농사 일기 8’).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시인은 바람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간절하게 그리고 엄중하게.

이러한 시인의 목소리를 저녁의 소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박형진 시인의 시에는 우리 이마를 때리는 저녁의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고추밭에서, 양파밭에서 또 무논에서 고단한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시인에게는 또 일궈야 할 시밭이 펼쳐진다. 시집 <밥값도 못 하면서 무슨 짓이람>은 그가 저녁마다 일구어 놓은 시밭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은 아침이나 한낮이 아니라 저물녘에 한 편씩 읽어야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이 시에 그 시의 창작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저녁의 ‘일기’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시집일 뿐만 아니라 시인의 집이기도 하다. 시인의 집에 내리는 저녁은 “콩씨콩씨콩씨”(‘시로 지은 농사 일기 14’) 이런 소리였다가 “빠지직빠지직/오랫동안 타는 땀방울” 소리였다가 “드윽 득득 드윽 득득”(‘시로 지은 농사 일기 23’) 긁어대는 소리였다가 “부우허어엉 웃는”(‘시로 쓴 농사 일기 36’) 소리이기도 하다.

박형진 시인은 농사일이나 시 쓰는 일이나 ‘지수굿하게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포옥 곰삭은 된장에 박아/한철 궁합을 맞추면/그제야 서로 내손질”(‘시로 쓴 농사 일기 33’) 내는 일이 그의 생업이고 시업이다. 한 권의 시집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지나갔지만, 한 편의 시는 어느 하루의 저녁에 깊은 울림을 새겨놓는다. 박형진 시인의 시집 <밥값도 못 하면서 무슨 짓이람>은 우리의 저녁을 시의 울림으로 귀 기울이게 한다. 오늘부터는 날마다 저녁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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