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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2. ‘기니미굴’이라 불린 라제통문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2. ‘기니미굴’이라 불린 라제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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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2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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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통문(무주구천동 제1경).
라제통문(무주구천동 제1경).

신라와 백제의 경계로 알려진 굴이 있다. 바로 무주에 있는 ‘라제통문(羅濟通門)’이다. 삼국시대에 뚫려 통로로 쓰였으며 굴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로 나뉘어 양쪽의 말씨와 풍습이 다르다 했다. 게다가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지나던 길이라 하니 ‘통일문’이라 불리며 한때 교과서에 실려 수학여행의 코스까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굴은 삼국시대에 뚫은 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내며 뚫린 것이다.

라제통문의 유래가 왜곡된 것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지만, 그곳은 무주구천동의 입구로 무주구천동 33경(景)의 시점이 될 만한 곳이다. 라제통문을 제1경으로 시작하여 33경인 덕유산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곳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5도의 접경지로 유구한 역사가 깃들고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접경지이다 보니 굴을 경계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나뉜다 했지만, 실제 라제통문은 설천면 신두마을과 이남마을 사이를 잇는 통로로 모두 무주군에 속한다. 인근 냇가에 민물 게가 많아 ‘게가 넘어가는 곳’이란 기니미가 이남마을의 옛 이름이라 라제통문을 ‘기니미굴’ 혹은 ‘설천굴’이라 했고, 그 굴을 낸 산은 덕유산(德裕山) 자락에 있는 ‘석견산(일명 석모산)’이다.
 

덕유산 향적봉 (무주군청 제공).
덕유산 향적봉 (무주군청 제공).

예로부터 ‘덕이 많아 너그러운 산’으로 불리던 덕유산은 다양한 생명을 넉넉하게 품은 산이다. 산세 따라 계곡이 발달한 덕유산 계곡의 맑은 물에는 꺽지, 금강모치, 동사리, 갈겨니 등이 서식하고 있고, 계곡 주변과 숲은 다릅나무, 전나무, 황벽나무, 구상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과 야생화들로 계절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그중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香赤奉)’의 이름은 천연기념물인 주목(朱木)에서 따왔다. 향이 좋고 나무의 껍질과 열매가 붉기 때문에 ‘향목’ 혹은 ‘적목’이라 불리는 주목 7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룬 곳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향적봉으로 오르는 중턱에는 ‘백련사(白蓮寺)’가 있다. 오래전 덕유산에는 절이 많았다고 전해지나 아쉽게도 흔적만 남아 있고 지금의 백련사는 6.25 전쟁 때 소실된 절터 옆에 1960년대 새로 지은 절이다. 고려 시기 번창하여 산 내 암자를 14개나 두었고 조선시기 부휴, 정관, 벽암, 매월당 등 유명한 고승들이 머물렀다 전해지는 사찰은 고지도 속 비슷한 위치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구천동사(九千洞寺)’이며 이를 백련암으로 혼용하여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이름에서 연상되듯이 무주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구천동이란 지명은 불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
 

1872년 지방지도 속 덕유산과 구천동사.
1872년 지방지도 속 덕유산과 구천동사.

일설에 구씨(具氏)와 천씨(千氏) 집안싸움을 어사 박문수가 말리면서 구천동(具千洞)이 구천동(九天洞)으로 되었다고 하지만, 조선시기 문인 임훈(1500-1584년)이 덕유산을 유람하며 남긴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는 “구천 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머문 땅이라 하여 구천둔(九千屯)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승려들의 거처를 ‘진 칠 둔(屯)’으로 칭한 것은 묘향산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적상산사고로 이관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마니산사고의 실록이 훼손되자 적상산 사고본을 근거로 교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에 수호사찰인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하여 승군(僧軍)을 두고 사고의 경비를 강화했던 것이다. 절이 많던 덕유산에 승군까지 합세하다 보니 구천 명 주둔설이 나왔고, 밥을 지을 때 쌀 씻은 물이 ‘만조탄(무주구천동 제10경)’까지 흘러 내려와 ‘뜨물재’라고도 했으니 구천둔에서 구천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날 만했다.

무주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가 한성을 잃고 공주로 도읍을 옮기며 정세가 불안해지자 가야계 소국 반파와 신라가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잦은 전쟁을 치렀다고 알려진 곳이다. 그 전쟁은 ‘철의 전쟁’으로 칭할 만 했고, 지역에서의 ‘철’의 생산과 가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무주현 편에서는 한 곳의 철장(鐵場)이 있어 “봉촌(蓬村)에서 연철(煉鐵) 2천 2백 근을 선공감(繕工監)에 바치고, 9백 14근을 전주에 바친다”라는 대목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토산으로 송이, 꿀, 인삼, 닥종이와 더불어 ‘철’을 내세운 기록이 있다.

지금도 제철유적은 구천동계곡과 얼음령계곡 등에 철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찌꺼기인 슬래그(Slag)의 흔적을 남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눈독을 들이는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철을 비롯한 무주의 각종 임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김천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내며 기니미굴을 뚫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매일신보>의 기사 속에는 무주 김천 간 도로 개통에 따른 효과를 홍보한 기사가 남아 있다.
 

1939년 07월31일 매일신보(좌), 1928년 12월 24일 매일신보.
1939년 07월31일 매일신보(좌), 1928년 12월 24일 매일신보.

오랫동안 세를 늘리며 번창했던 덕유산의 절들은 세월의 풍파 속에 소실되었지만, 라제통문은 국도 30호선을 이어주며 무주구천동 33경을 열고 있고, 백련사는 불자들의 마음과 덕유산을 찾는 방문객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또한, 1910년 국권을 잃고 폐지된 적상산사고는 치열하게 지키고자 했던 선조들의 융숭한 정신을 품고 새로 옮겨진 자리에 굳건히 남아 있다. 뜨거운 팔월을 지나다 보니 덕유산 넉넉한 품에 깃든 이야기와 아울러 잊지 말아야 할 일제의 수탈 흔적에 마음이 간다.

라제통문을 통과하면서 만나는 아름다운 절경과 선조의 얼이 깃든 사연은 우리를 특별한 시간으로 이끈다. 그곳엔 수려한 풍경보다도 더 귀한 사연을 지닌 무주 설천면 출신의 의병장 강무경(1878-1909년)을 기념하는 공간이 있다. 의병활동을 함께 한 부인 양방매와 부부 의병으로도 알려진 강무경은 치열한 의병활동을 이어가다 일제에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무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반딧불이를 보러 가거들랑 우리의 역사를 올곧게 다져준 선조들의 빛나는 마음도 함께 만나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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