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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뜻을 바르게 쏘아 올린 전주의 활터 '천양정'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뜻을 바르게 쏘아 올린 전주의 활터 '천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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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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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주문화원 사무국장
1944년 천양정에 실시한 궁도대회 모습.
1944년 천양정에 실시한 궁도대회 모습.

2018년 11월 22일 「제5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서 천양정 관련 문건이 2건 나왔다. 하나는 1960년대 궁도대회의 결과를 알 수 있는 획기지와 하나는 천양정 사원(射員)인 이종성(1917生, 작고)의 활통과 일기장이다.

획기지(劃記紙)란 사정(射亭)에서 사원들이 대회를 할 때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기록한 성적표이다. 대회를 다 마친 후에는 장원자에게 획기지와 부상을 수여하는 것이 사정의 전통이었다.

획기지를 기록하는 방법은 가장 먼저 사정명, 성명, 초순, 중순, 하순의 칸이 있고 맨 마지막에는 합계를 기록하는 선이 있다. 획기지에 선을 긋고 그 안에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는 숫자를 기록하는데, 초순에 5발을 쏘아 맞힌 숫자대로 가운데 중(中) 자가 찍힌 도장을 찍고, 불발을 하면 그냥 동그라미 도장을 찍는다. 이어서 중순과 하순을 한 다음 총 15발을 쏘아 합산을 하여 맨 아래에 적중한 숫자를 기록한다. 그래서 획기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활쏘기 실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장원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출품된 자료는 단기 4293년 9월 18일에 제41회 전국 체육대회 전북예선대회, 제64회 전라북도 궁도 선수권대회 획기지이다. 주최는 전라북도궁도협회이고 후원은 전주 천양정이다.

 

△옛 사원(射員)이 천양정에서 쓰던 활통
 

이종성 씨가 작성한 일기.
이종성 씨가 작성한 일기.

천양정의 사원으로 활동한 이종성 씨는 완산동에 집이 있었는데 김영은 씨가 고택의 물건을 수습하여 오다가 예사롭지 않은 활 통과 일기장 43점을 발견하여 전주시에 기증하게 되었다.

붉은빛을 띠는 활통에 향산(香山)이라는 호가 적힌 것으로 보아 이종성의 호를 향산으로 추정할 수 있고, 활통 안에는 화살이 13개, 작은 화살이 6개, 검은색 작은 화살이 1개 있었다. 화살통은 옻칠이 되어 있으며 중간은 끈을 2줄로 묶어서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위쪽은 뚜껑이 있어 활을 넣고 빼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일기를 살펴보면 천양정에 가서 활 연습을 하였다는 대목이 자주 나오며, 정읍 필야정에서 주최하는 궁도대회에 참석하여 궁도 입문 이후 최초로 입선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 개인의 일기장이지만 거의 매일 다가산에 활을 쏘기 위하여 가는 한 사원의 모습을 볼 때 전주 사람들에게 천양정은 매우 중요하였고, 단지 활을 쏘기 위한 장소가 아닌 조선시대 향사례(鄕射禮)의 전통을 이어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정신의 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종성 씨가 사용한 사원 활통.
이종성 씨가 사용한 사원 활통.

△충의를 중요시하는 천양정의 사원들

1712년(숙종 38년)임진년에 전주부 내의 유지들이 강무(講武:조선시대 임금과 신하, 백성들이 함께 사냥하며 무예를 닦는 일)를 위하여 다가교 서쪽 기슭에 4칸의 정자를 짓고, 과녁을 북서쪽 황학대(黃鶴臺:현 신흥학교)에 세우고 천양정이라 명하였다. 이곳 황학대는 신흥학교 본 건물 뒤에 있는 터로, 학교 뒷 건물로 들어가면 황학대를 알리는 황학문(黃鶴門)이라는 암각서가 있다. 그러나 9년 뒤에 홍수를 만나 천양정이 모두 유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1722년에 전주부 무인 김삼민 등 4인이 발기하고, 유지들의 협조로 다가산 아래 다가정을 김삼민의 소유로 짓게 된다. 그래서 다가정은 천양정의 정신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830년 다시 사정을 만들 때 전주의 부노들은 당연히 옛 이름인 천양정을 사용하게 된다.

다가산 아래 천양정의 ‘천양(穿楊)’이란 뜻은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뜻으로, 신묘한 활 솜씨로 이름 높았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활쏘기는 고대에 이미 존재했고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도 신궁으로 알려졌다.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데 남원의 황산전투가 밑거름이 되었는데, 사실 이 전투에서 아지발도를 무찌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발의 화살이었다. 조선을 창제하는데 이성계의 신궁에 가까운 솜씨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전하고 있다.
 

천양정 획기지 (전주정신의 숲 소장).
천양정 획기지 (전주정신의 숲 소장).

△청양정 사원들이 법정 투쟁으로 다시 찾은 다가산

광무 9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명목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1906년 3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통감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국 내 일본인 경찰을 1400명 규모로 늘리며 경찰기구를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에 드나들면서 애국심을 불태우는 사원(射員)들을 제지하기 하기 위해 학교를 건립한다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사정들을 통합하게 된다. 1912년 전주부 내에 있던 군자정(현재 기령당), 다가정(다가산 바로 밑), 읍양정(곤지산 동쪽)을 강제로 통합하고 사정의 재산을 매각하거나 학교를 짓는데 강제로 기증하도록 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것이 지금의 다가산 북서쪽에 자리한 천양정이다. 천양정 사원들은 1918년 5월 29일 이건호를 천양정 사장으로 선임하고 새로운 발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다가산 정상에 일본인들이 조선의 기를 누르기 위하여 신사가 만들어지자, 천양정의 사원들은 모두 합심하여 투쟁하였다. 분하고 또 분하였으나, 사원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일본의 야욕은 막강했다. 이후 광복이 된 이후에야 법적 소송을 통해 옛 땅을 회복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이 천양정 앞 효산 이광열의 기적비에 잘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가산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전주천과 푸른 나무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다가산 지킴이 효산 선생 덕이다. 우리가 애국하자는 소리를 말로만 외치기는 너무도 쉽고, 전장에 나가 싸워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땅을 지키면서 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정신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이 천양정에는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주문화원 사무국장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주문화원 사무국장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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