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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태건 시인 - 이병초 시집 ‘까치독사’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태건 시인 - 이병초 시집 ‘까치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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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0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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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악巨惡과 싸우기 위해선, 모든 걸 다 걸어야 하리

누구에게나 적은 있다.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은 아버지가 독사에 물렸다. 그때부터 창암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뱀을 보는 족족 죽였다. 나중에는 창암이 나타나면 뱀이 스르륵 자취를 감출 정도였다. 그래서 전주시 인근에서 정월달 ‘뱀막이 하는 날’이면 이삼만이라는 글씨를 써서 집안 기둥은 물론 장독대까지 거꾸로 붙이는 풍속이 생겼다.

적은 어디에나 있다. ‘위협하는 뱀’ 이야기는 종교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졌다. 사악한 뱀의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의 시각이다. 이야기를 바꿔보자 ‘뱀을 위협하는 인간’은 옳은가? 이병초 시 ‘까치독사’는 궁지에 몰린 뱀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대결과 야만의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견뎌온 것일까? 시인은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소외된 약자가 아니던가?

적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 모두 가난했음으로 어쩌면 아름다웠다. 이병초의 시집은 더불어 사는 ‘빛나는 시절’을 회상한다. ‘꽃을 보면 꽃이 되고/벌이 되고 나비가 되던 시절/남들 쉴 때 나도 쉬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가? 시인은 모두 잊고 사는 것을 기억해내는 직업이란 말이지. 시집 곳곳에 전라도 말씨가 풍성하게 ‘엉겨 번진다’, 전라도 말이 주변부, 소수자의 언어로 밀려나서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과 산 사이 마을의 칡넝쿨을 걷어낸 자갈밭에 까치독사가 나타난다. 독사는 경계를 침범하는 적에게 ‘입을 쩍 벌리며’ 위협한다. 더 가까이 오면 독 묻은 이빨로 숨통을 물어뜯어버리겠다고. 뱀은 물러설 줄 모른다. 그런데 뱀에게는 누군가에 얻어맞은 상처가 있다. 상처가 깊어서 곧 죽을 것 같은 뱀이, 제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다. ‘목숨을 걸고’. 그걸 보는 시인은 ‘네 일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병초 시인은 지금 사학 재단과 싸우는 중이다. 거대한 힘과 싸우느라 5년이 훌쩍 지났다. 경제적 곤란보다 세상의 야박함이 더 지치게 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이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비가 온다. 비처럼 시인은 노래를 부르고, 그럴 때마다 시인의 작은 몸도 흔들린다. 거악巨惡과 싸우다가 상처 받은 이들에게 시인은 절절한 위로의 노래를 부른다. 이 시대에 순정을 지키고 우직하게 산다는 것은 어쩌면 모든 걸 다 걸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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