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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⑨ 춘향전, 최고의 고전소설 비결…한국적 한(恨)의 ‘삭임’ 미학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⑨ 춘향전, 최고의 고전소설 비결…한국적 한(恨)의 ‘삭임’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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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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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춘향가’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으로 정착
120여 이본 중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 가장 많이 읽혀
'춘향전'의 생명력, 민중의 한 대변하는 춘향의 저항정신
우리 한민족 ‘삭임’의 미학, 단군 ‘한사상’에 맥이 닿아
남원 광한루 야경.
남원 광한루 야경.

“금 술잔의 아름다운 술은 만백성의 피요(金樽美酒千人血) / 옥쟁반의 맛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玉盤佳肴萬姓膏) /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燭淚落時民淚落) /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드높도다(歌聲高處怨聲高)” 변학도 생일잔치에 암행어사인 이몽룡이 걸인 행색으로 들어와 슬며시 내보인 시다. 이 시는 <춘향전>이 우리나라 최고의 고전소설로 일컬어지는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통쾌한 작품이다.

춘향전은 우리 한국문학의 상징이요, 보물이다. 한 개인의 창작품이 아닌, 누대에 걸쳐 여러 설화들이 꿰어져 이루어진 구비문학이요, 민중들 사이에 판소리로 불리다가 정착된 적층문학이다. 그러기에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이본(異本)만 해도 120여 종이니 이야기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 살아 있는 문학으로서 민중의 사랑을 함뿍 받으며 정착된 작품이라 하겠다.

춘향전을 포함한 흥부전, 심청전, 별주부전 등의 판소리계 소설은 소설로 정착되기 이전에 판소리로 불리던 작품들이다. 춘향전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오랜 문헌이 1754년의 만화본 ‘춘향가’인데, 이는 한역(漢譯)으로 전해오고 있어 그 이전의 원(原) 춘향전은 현재 알 길이 없다. 수많은 이본 중 대표적인 것이 <남원고사>와 <열녀춘향수절가>이다. 남원고사는 1860년대 서울에서 필사된 것으로 경판본의 원류격이 되며, 가장 많이 읽히는 완판본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는 19세기 후반 전주에서 간행된 <별춘향전>의 계열로 나온 것이다.

남원고사의 춘향과 열녀춘향수절가의 춘향은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남원고사에서 춘향은 기생으로 나오고, 성격도 교만하며,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반면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서는 성참판의 서녀로서 여염집 처자로 나오고, 정숙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두 춘향의 신분과 성격이 이렇게 대조적으로 그려진 것은 당대 민중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서울 지역 양반층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남원고사에선 춘향이 비속하게 그려진 것이라 하겠고, 신분상승의 염원이 담긴 평민층 중심의 완판본에서는 춘향을 다소 미화하여 민중의 꿈을 담아낸 것이라 하겠다.

판소리 춘향가가 여러 이본의 소설 춘향전으로 거듭나면서 활발하게 읽히던 시기는 19세기로 추정되는데, 정조 이후의 19세기는 그야말로 세도정치, 삼정문란, 농민수탈 등으로 중세 통치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시기이다. 열녀춘향수절가는 그 표제부터 유교의 윤리적 가치를 중시한 작품으로 개작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1장에서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사 성자성손은 계계승승하사”로 시작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한 조선 말기에 국태민안을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이 후대의 춘향전으로 갈수록 짙어진다. 춘향이 변학도에 저항하는 것도 결국은 국가적 질서가 바로 잡히길 원하는 백성들의 소망이 담긴 것이다.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다섯 마당만 전해오는데, 이 역시 당대의 민중들의 염원과 연결된다. 골계 위주의 판소리는 생명력을 잃게 되었고, 골계와 더불어 비장미가 조화를 이룬 판소리들이 당대 민중들에게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민중의 진정한 현실을 담는 리얼리티는 비장미와 더불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비장미는 근대적 자아의 소유자라 할 수 있는 춘향의 패배에서 비롯된다. 이몽룡과의 이별, 변학도에 의해 당하는 태형과 하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패배를 통해 춘향으로 대변되는 백성들의 한(恨)은 응집되며, 이는 비장미를 극대화하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오페라 춘향전 장면(2015년 오스트리아 빈)
오페라 춘향전 장면(2015년 오스트리아 빈)

춘향전은 판소리에서 나왔으되 판소리는 아니며, 정착이 이루어진 한 편의 소설이다. 춘향전의 원전에 가까운 것이 남원고사 계열의 경판본이냐, 별춘향전 계열의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냐를 떠나, 변형 가능한 춘향전으로서 평등사회를 꿈꾸는 민중의 뜻이 잘 담긴 것은 뒤에 간행된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찾아진다고 할 수 있다. 춘향전은 이제 우리나라만의 고전이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세계의 화려한 무대 위에 춘향은 오페라의 한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 존재감을 당당하게 발휘하기도 한다. 춘향전이 이렇듯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과연 어떤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일까.

대체로 소설은 결핍과 결핍 해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에는 강자와 약자의 대결 양상이 나타난다. 퇴기 월매와 성참판의 서녀로 태어난 춘향의 결핍 요소는 기생의 딸이라는 점이다. 미천한 신분이 양반 자제 이몽룡과 사랑을 이루고 마침내 정렬부인에까지 오르기에는 결핍 해소를 위한 춘향의 노력, 즉 근대적 자아 개념에 눈을 뜬 한 인간의 진실적 저항이 필요했다. 여기서 발견되는 게 한국적 한(恨)의 궤적이다.

젊음의 춘정과 신분상승 의지로 출발한 이몽룡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암행어사 이몽룡과의 재회까지의 사랑 이야기에는 한국적 한의 승화 과정이 놓여 있다. 평론가 천이두는 한국적 한은 다층적이며, 부정적 한이 긍정적 한으로 승화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한국적 한의 구조>에서 밝힌 바 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요소에는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우리 민족의 정체성으로서 복합적인 한(恨)의 양상이 나타난다. 부정적 한으로서의 원(怨)과 탄(嘆)이 ‘삭임’의 과정을 거쳐 원(願)과 정(情)으로 승화된다.

춘향의 첫 좌절은 이몽룡과의 이별에서 찾아진다, 이몽룡으로부터 이별의 말을 들었을 때 춘향은 “왈칵 뛰어 달려들며 치맛자락도 와드득 좌르륵 찢어버리며, 머리도 와드득 쥐어뜯어 싹싹 비벼 도령님 앞에 던지”면서 저항한다. 춘향의 공격적 한, 원(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약자의 한은 이내 퇴영적 탄식으로 바뀐다. 옥중 춘향의 탄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춘향 이야기의 극적 전개는 옥중의 꿈을 통해 시작된다. 황릉묘(黃陵廟)의 꿈이 그것이다.

옥중 꿈속에 춘향은 역대의 열녀들을 모신 사당 즉 황릉묘에 올라 그들의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는다. 이는 옥중에 갇혀 처참해진 춘향이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신분상승 의지보다는 이몽룡을 향한 수절(또는 사랑)로 반전하는 극적 장치가 된다. 대체로 힘은 밖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그 내면 변화의 힘은 옥중에 걸인 행색으로 나타난 이몽룡과의 만남에서 표출된다. 출세한 이몽룡을 기다려왔는데 이몽룡은 초라한 걸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때 춘향은 어머니 월매에게 유언으로 부탁한다. “금명간 죽을 년이 세간 두어 무엇 할까. 용장, 봉장, 빼닫이는 되는 대로 팔아다가 별찬 진지 대접하오. 나 죽은 후에라도 나 없다 마시고 날 본 듯이 섬기소서.” 모든 기대가 일시에 무너졌음에도 춘향은 오히려 이몽룡을 염려하며 돌봐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한의 독소인 공격성[怨]과 퇴영성[嘆]을 초극하여 윤리적, 미학적 가치로 삭이고 발효시킨 것이다. 승화되어 다시 태어나는 옥중 춘향의 주체성은 천이두의 “한국적 한의 내재적 지향성으로서의 이 삭임의 기능이야말로 이른바 한국적 한의 진정한 고유성이라 할 것이다.”라는 말에서 그 해답이 찾아진다.

‘임방울 춘향가’나 <옥중화>에서 춘향은 이몽룡에게 본관사또[변학도]마저 괄시하지 말라는 부탁까지 한다. 본관사또 아니고 보면 열녀 춘향이 어디서 나왔겠느냐고까지 말한다. 여기서 춘항의 한은 변학도를 용서하고 오히려 감사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게 곧 우리 민족 고유의 한의 세계요, 자타를 초월한 지고한 경지라 할 것이다. 춘향의 한은 우리 민중의 한을 대변한다. 여기에 춘향전이 민중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존재한다. 이 점이 곧 춘향전의 진정한 생명력이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역사적 산물로 이루어진 한(恨) 말고 우리 한민족 고유의 ‘한사상’이 존재한다. ‘한’은 너와 나를 넘어선 것이며, 세계와 우주를 하나로 보는 단군 이래의 철학이다. ‘한’은 하나이면서 전체이다. 그래서 반만 년 이상의 훨씬 전에 ‘홍익인간’이라는 통치이념이 나온 것이다. 밝음을 추구하는 근원적 저력이 내재하기에 우리 민족은 원망[怨]과 탄식[嘆]을 승화하여 소망[願]과 정한[情]의 세계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춘향전이 민족적 고전성을 인정받고 아울러 세계의 고전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삭임’이라는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에서 나왔던 것이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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