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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4. 표암 강세황이 인증한 부안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4. 표암 강세황이 인증한 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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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0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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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불어오니 설렌다. 그 산들거리는 바람결에 묻어나는 산과 들의 내음이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불러오기도 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한다. 예로부터 선조들은 우리 산천을 비단에 수를 놓듯 아름다운 강과 산이라는 뜻인 ‘금수강산’으로 칭하며 사철마다 그 풍광을 즐겼다. 가을은 특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부추겨 자연으로 발걸음을 이끌게 하는 계절이다.

요즘에는 청정한 자연을 찾는 생태관광이 인기가 있고 수려한 풍경을 인증한 사진들이 SNS로 전파되어 떠오른다. 이러한 열풍은 예전부터 있던 것으로 선조들의 경험과 시선을 담은 그림과 기행문이 유행하여 선비들의 유람문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 시대에 가장 핫한 장소로는 금강산과 지리산을 비롯한 팔도의 명승지들이 많았는데, 그중 조선 최고의 문인화가가 부안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그림이 있다. 바로, 등에 표범 문양의 얼룩점이 있어 ‘표암(豹庵)’이라는 호를 지닌 강세황(姜世晃, 1713-1791년)이 그린 <부안유람도권(扶安遊覽圖卷)>이다.

<우금암도> 혹은 <부안실경도>로도 알려진 그림은 강세황의 둘째 아들인 강완(1739-1775년)이 부안현감으로 재직하던 1770년이나 1771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두루마리 형태의 옆으로 긴 횡권 위에 그려진 6장면의 그림은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그야말로 야외 스케치로, 짧은 시간에 특징을 요약해서 그린 실경산수화의 밑그림 격인 초본 같다. 그림과 함께 기행문을 중간에 적어 넣었는데 간간이 수정한 흔적이 보인다. 이후 글은 유람기로 정서하여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 등에 실었다.
 

강세황의 자화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의 자화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글과 그림을 따라가 보면 음력 2월이라고만 기록한 그의 동선을 만날 수 있다. 부안 유람의 여정은 아들이 있는 ‘부안현의 서문’을 나서면서 시작되어 ‘동림서원, 청계서원’을 거친다. 변산 입구로 들어서 전각이 날듯이 서있다며 ‘개암사’를 칭하고 그림에서의 첫 장면이 펼쳐지는데, 우금굴이 있는 ‘우금암’을 웅장하게 표현하고 그 품 안에 옥천암을 그려 넣었다. 바로 옆의 봉우리는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우금암’을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소감을 적어놓고, 우금암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에 있는 석벽에 둘러싸인 평지인 ‘문현’을 그렸다. 그림 한켠을 살펴보면 산길을 오르는 가마 탄 일행의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안유람도권’ 그림 내 ‘문현’과 ‘용추’를 확대한 부분도.자세히 보면 유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게 등장한다.
‘부안유람도권’ 내 ‘문현’과 ‘용추’를 확대한 부분도. 자세히 보면 유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게 등장한다.

이어진 그림에는 그의 일행이 하루 묵은 ‘실상사’와 ‘용추폭포’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사실, 그의 글에 의하면 실상사에서 묵고는 경치가 좋다던 월명암을 가려던 참이었는데, 눈길이 미끄러워 가지 못하고 방향을 바꾸어 간 곳이 용추폭포였다. 하지만 오히려 더 험한 길에 고생을 하였다며 후회한 내용을 기록했고 용추폭포 절벽 쪽은 가파르게 표현했다. 그는 “길이 험해 가마조차 타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었다”란 글을 남기며 앞서 가마를 탄 모습에 자신의 감정을 실었다. 그리고는 폭포 위에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두 명의 사람을 그려 넣어 긴장감이 느껴지도록 하면서 현장감도 살렸다. 마지막에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는 실상사의 부속암자로 여겨지는 ‘극락암’을 그렸고 내소사를 거쳐 돌아 온 것으로 일박 이일의 부안여정을 인증하였다.

그는 어렵게 다니며 그림을 남겼지만, 이제는 개암사 주차장까지 차로 올라가 개암사와 어우러진 우금암을 사진으로 인증할 수 있다. 개암사는 백제 634년 묘련스님이 창건한 왕궁 사찰로 알려져 있다. 개암사의 사적기에는 676년 원효, 의상 스님이 우금암 아래에 있는 우금굴에 머물렀고 이를 암자로 중수해, 이후에는 ‘원효방(元曉房)’이라 불렀다 한다. 그곳은 고려 문인 이규보도 인증한 곳으로 <팔월 이십일에 능가산 원효방에 제하다>에 원효가 머문 바위굴에 다녀간 심정을 시구로 남긴 바 있다. 원효방의 본사인 개암사의 대웅전(1636년 중건)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또한, 개암사는 1688년 부안의 기녀 이매창의 문집인 『매창집』을 간행한 장소로 강세황도 유명한 이 일대를 인증하고 싶었을 것이다.
 

개암사와 우금암 전경. 사진=부안군 제공
개암사와 우금암 전경. 사진=부안군 제공

강세황은 부안을 비롯하여 개성과 금강산 등의 산수화와 왕의 어진을 관장하며 인물화를 그리고 활발하게 활동을 한 문인화가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강세황은 그림을 그리지 않은 절필 시기가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부안에 와 <부안유람도권>그린 것으로 추정되어 더욱 특별하다. 김홍도의 스승인 그는 특출난 화가였지만, 영조와 정조 임금에게 인정을 받았던 관료였다. 강세황이 관료가 된 과정도 독특한데, 그는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벼슬길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안산에서 30여 년을 지냈다.

하지만, 뛰어난 인물로 소문난 그를 눈여겨본 영조가 관료들이 그를 그림을 잘 그리는 자로 표현을 하자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하명했고, 이를 전해 듣고 감복한 그는 51세부터 10여 년 동안 스스로 절필했다. 이후 강세황은 영조의 배려로 늦은 나이인 61세에 벼슬길에 올라 현재의 서울시장격인 한성부판윤을 지내기도 하였다.

강세황이 부안유람을 나선 길에 멋진 풍경을 보고는 흥취에 젖어 화폭에 풍경을 담아내기는 했지만, 왕명과 자신과의 약속을 의식해서였던지 간략한 스케치로만 남았다. 사실 영조의 명으로 절필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없으며, 그 절필의 과정과 문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은 본인의 자서전과 그의 넷째 아들 강빈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을의 흥에 대하여 강세황은 “산에 있는 스님이 단풍이 붉게 물들었다고 전하니 / 단촐한 행장이지만 그림 도구와 시 짓는 통을 가져가리라”는 멋진 문장을 남겼다. 나들이를 부르는 계절, 가을 깊어가는 산에 단풍 소식이 들리면 그 스케치 여행길을 따라 어제와 오늘을 함께 인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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