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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붓끝으로 이룬 천지조화, 이정직 ‘서화첩’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붓끝으로 이룬 천지조화, 이정직 ‘서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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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0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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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첩
서화첩

학문에 더욱 힘쓰면서 감히 고인古人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약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스스로 실망하지 않을 것이고,

비록 세상에 쓰이지 못해도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알아주는 이 없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명과 시대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운명과 시대 역시 내게 주어진 소명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니,

하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것에 대한 답을 할 뿐입니다.

- 이정직이 황현에게 보내는 글에서

 

타고난 남다른 재능과 후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고, 그래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지도 못했다. 그를 알아봐 주고 끌어줄 스승도 없었고, 그에게 그림과 글씨는 스승이자 친구이자 모든 것이었다. 고인의 경지에 이르고자 힘쓰는 것. 그것을 하늘이 내린 소명으로 삼는다는 말은, 그의 인생을 돌아볼 때 가슴 한 켠에 진한 울림을 준다.

갑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던 1894년, 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던 그는 54세의 나이에 전 재산과 저작을 잃었다. 그러한 좌절을 딛고 김제로 돌아와 세상을 떠난 1910년까지 약 15년 동안 저술에 힘쓰고 서화에 매진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옷을 걷어 부치고 제자가 되고자 찾아왔다. 계단에는 신발이 그득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 그림과 글씨, 시와 저술들이 그를 지탱해주었을 것이다. 이정직은 “실제 매화보다 매화 그림이 더 좋다”고 한 바 있다. 매화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여 그림으로 그려졌지만,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묵향墨香을 머금고 자연 속 매화보다 훨씬 더 멋스럽다.

총 8책(314면)으로 이루어진 <서화첩>에는 모란, 연꽃, 수국, 포도, 매 梅·난蘭·국菊·죽竹의 사군자 등이 담겨 있다. 그의 그림들은 화면 속에서 먹과 필법, 여백을 활용하여 천지조화를 이루며 잔잔한 묵향墨香을 전해준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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