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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1950년대 고등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1950년대 고등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김재호
  • 승인 2019.10.09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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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에 실린 청춘 이야기
천주교 성지 자긍심 드높고
뒤떨어진 과학기술 살려야 결기 돋보여
전주전북고등학교 학우지 고광(孤光)편, 1952년.
전주전북고등학교 학우지 고광(孤光)편, 1952년.

1959년 9월 전주 전동성당에 다니는 학생들이 펴낸 ‘聖友’ 창간호(전주시 제2회 기록물 수집 공모전 대동상)와 1952년 전주 전북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펴낸 학우지 ‘窓’(4회, 올곧음상)을 통해 60년 전 청춘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들여다보자.

현재 80대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은 일제 때 태어났다. 사춘기 때 6·25전쟁을 겪었고,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일가를 이루고 세파를 헤쳐 온 고난의 행군 중심에 있었다. 그들이 청춘일 때 펴낸 문예잡지를 통해 금강석보다 강한 열정을 만나본다.

그들은 ‘내일에 의뢰하면 공허한 어제를 남긴다’ ‘Boys! Be ambitions!’ 등을 금언 삼아 살았다.

 

△전주 전동천주교학생회 ‘聖友’ 창간호
 

성우(聖友) 창간호(1959년).
성우(聖友) 창간호(1959년).

‘聖友’는 1959년 8월13일 인쇄, 9월5일자로 발행된 전주 전동천주교학생회가 발간한 종교 잡지다. 학생회장에 따르면 성우는 천주교 성지에 자리잡은 전동천주교회 학생회의 ‘불품는 듯한 정열’의 산물이다.

60년 세월을 견디느라 종이는 누렇게 변색,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교과서 크기 152쪽에 담긴 글에는 천주를 향한 신앙, ‘眞善美’한 삶이 깃들어 있다.

세로 2단 또는 3단으로 편집됐고, 표지를 오른쪽으로 넘기면 ‘전라선 전주시 덕진역전 조방지거 德津陶瓦工場’ ‘전주시 전동 88 전화 436番 永豊양조장’ ‘전주시 역전 노송동 601 전화 7708番 普光出版社’ 등 3개의 상업광고가 표출된다.

광고란 상단에 편집된 ‘우리의 盟誓’는 엉뚱해 보이기도 하지만, 6.25전쟁을 겪은 지 몇 년 안 된 당시 시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맹서 3개항은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 통일을 완수하자’다.

사진 2장이 실렸는데, 한 장은 여학생들의 쁘레시디움 봉헌사열식 입당 광경이고, 다른 한 장은 1959년도 전북교구교리 및 구기대회 우승 기념 사진이다.

글은 절반 정도가 한자인 국한문 혼용이다. 요즘 기준으로 한자 3급 이상 수준의 한자들이 많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이 혼란스럽다.

김홍섭님의 기고 ‘殉敎者의 遺趾를 찾아서’를 살펴보자. 이 글은 유항검 일가 순교 후 100여년 만에 이굴된 당시의 상황을 이서면 재남리 바위백이 이굴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박요셉씨(이서면 재남촌, 63세)의 증언을 토대로 상세히 다룬 기고문이다.

‘그 곳은 전주서 서북방향으로 약40里許 전군가도에서 式側으로~’ ‘약500米突을 一邊으로 하는’ ‘그 일가족들의 손자욱이 혹시나 印처졌음직도하여’ 등은 낯설다.

‘許’는 ‘그 쯤 되는 곳’이고, ‘式側’은 ‘옆으로’, ‘米突’은 ‘미터’로 해석된다. 한글도 아릿다운, 불품는 듯한 정열, 나어린 농부들이, 흐르고 말었습니다 처럼 현대인이 보면 낯선 표현, 표기다.

성우에 실린 글은 순교자의 유지를 찾아서, 조선 천주교회의 유래, 가톨릭적 성서관 등 대부분 교회 이해에 관한 것들이다. 신실함을 다지는 편지글, 수필 등은 물론 음악에 대한 글도 실렸다. 박창유의 글 ‘나의 死生觀’처럼 무거운 글도 있지만, 김진수의 글 ‘비와 故鄕’이나 조정운의 ‘追憶’처럼 비 내리는 장면을 보면서 고향을 연결 짓거나 희망을 노래하는 수필도 다수 실렸다. 조정운은 추억에서 창밖의 만상을 바라보며 “희망에서 살라. 행복이 오리라”고 노래했다.

또 15편이 시와 단편소설 ‘마리아의 소녀들의 기도’(김옥순 작), 시나리오 ‘어머니’(김금순) 등 창작물이 실렸고, 특집편에서는 마틴 루터 생애를 약전 형식으로 다뤘다.

‘전동가톨릭 학생회칙’에 따르면 학생회는 1959년 4월에 출범했고, 회원은 고등학생이었다. 또 이광수 학생회장의 창간사에 따르면 학생회원은 300여 명이었고, 또 ‘전주전동천주교회와 尹방지거 사베리오 神父’ 편에 따르면 전동천주교회 신자는 4000명을 헤아렸다.

성우에는 전동성당과 유항검, 치명자, 성모마리아 등에 대한 글들이 많다. 그 만큼 유항검 일가 성지에 살며 전동천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깊게 생각하는 분위기다. 유항검은 1784년 천주교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순교자가 되었다. 그 성지에 1914년 전동성당을 세운 프랑스 출신 윤방지거 사베리오 신부는 1915년 57세의 나이에 사망한 후 유요안·이루갈다 동정부부를 모시고 치명자산에 누웠다.

 

△전북고등학교를 잊지 말자
 

전주전북고등학교  학우지 창(窓), 1952년.
전주전북고등학교 학우지 창(窓), 1952년.

1952년 2월 세상에 나온 전북고등학교 학우지 ‘窓’ 창간호는 窓編과 孤光編 등 2편이다. 잡지 뒤편에 소개된 61명 소개란의 생년월일을 보면 4263~4268년 생, 그러니까 17~22세 학생들이다. 나이 차가 있다 보니, 18세 학생에 대해서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와도 같다’고 소개하고, 22세 학생에게는 ‘우리반에서 제일 할아버지’ ‘늙은 친구 장가는 가셨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하고 장난어린 소개를 하고 있다.

전주고등학교가 1951년 9월1일자로 개칭해 출발하면서 기존 전북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전주고로 편입된 모양이다.

월영 학생은 권두사에서 “우리들 학우들의 우정이란 偉力으로 (중략) 전 전북고등학교의 추억의 실마리를 풀어 그윽한 그 향기를 풍기어 본다는 의미로(후략)” 창간했다고 썼다.

또 ‘窓’의 ‘孤光編’에서 손건 학생은 ‘전북고교가 그립다’는 글을 통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오늘은 우리는 전주고등학생이다. 또한 1학년 시대는 전북이란 이름 그대로 전북고교생이었다. 그날의 학생수는 많지 않게 文理科 합해서 120명 밖에 아니되였다.”

이 글에 따르면 손건은 1952년 당시 전주고 2학년이다. 또 문과와 이과는 각각 60명 정도로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窓 편집진이 연도 표기를 서기 대신 단기(4285년)로 표기한 것도 눈에 띈다. 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 때문이었을까. 활자가 아닌 등사 인쇄했다. 기름종이에 철필로 원고를 쓴 다음 잉크 묻힌 롤러를 밀어 인쇄 했는데, 글씨는 매우 반듯하다.

글감 대부분은 우정과 학창시절 추억, 그리움, 선생님, 전북고등학교가 없어진 데 따른 아쉬움과 향수 등이다.

청춘의 기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금강석과 같고 에베레스트와 같은 우뚝 솟고 빛나는 인류를 위하고 대한민국을 위하는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을 맹서한다.

窓編 3~6쪽에 실린 글 ‘新有機化合物의 合成’에서는 학구적 열기, 애국적 결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1951년 미국에서 결핵균에 유효한 신유기화합물이 발견됐는데, 그 합성법을 고찰하는 원고를 게재했다. 세계 선진국에 뒤지지 않아야 겠다는 결기가 살아 있다. 뒤떨어진 기초과학 논쟁이 한창인 대한민국 현실을 본다.
 

김재호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북일보 선임기자
김재호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북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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