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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코와 반제티의 수난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
  • 김은정
  • 승인 2019.10.10 2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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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선임기자

벤 샨(Ben Shahn, 1898~1969)은 미국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다.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여덟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1900년대, 경제공황 상황에 놓인 미국의 도시 빈민과 민중의 억눌린 삶을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사회적 부조리를 고발했다.

그의 대표작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도 그 중 하나다.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은 1920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신발공장에서 두 명을 죽인 혐의로 기소된 제화공 니콜라 사코와 생선상인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의 사건을 다룬 그림이다.

사코와 반제티는 살인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지만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고 결국은 처형당한 이탈리아 출신의 노동자다. 이들은 7년이나 지속된 재판과정에서 범죄사실을 부정하고 억울함을 항변했지만 판결은 바로 잡아지지 않았다. 숱한 항소가 제기되었지만 모두 1심 판사에 의해 기각됐기 때문이다. 사실 성실했던 이들 노동자들에게 덧씌워진 누명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무정부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가해진 폭력이었다.

이 재판은 당시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들이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로 기소된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항의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세계 도처에서 이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아인슈타인이나 아나톨 프랑스 같은 명사들도 탄원에 나설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 대법원은 세계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재심 요구를 기각했으며 1927년 사형선고를 확정, 불과 20일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이들의 사형소식이 전해지자 분노한 군중들은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도시에서 시위를 벌이거나 폭동을 일으켰다.

사코와 반제티의 억울한 죽음이 가려진 것은 사형 당한지 30여년이나 지난 1959년이다. 진짜 범인이 나타나자 그제야 이들에게 사면이 제안됐다. 편견과 의혹이 가져온 폭력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 사건은 당시 반공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던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벤 샨의 그림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에는 정치재판의 희생자 사코와 반제티 사이에 회색빛 얼굴을 가진 법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념을 가진 두 노동자의 얼굴은 살아있으나 법관의 얼굴은 죽은 자의 낯빛이다.

편견과 의혹이 진실을 가려 버린 이즈음, 그림 한 장이 주는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다. 그렇고 보니 진실의 힘이 더 절박해진 시절이다. /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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