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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5. 7일의 왕비와 순창 삼인대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5. 7일의 왕비와 순창 삼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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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1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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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삼인대의 비각과 가을 풍경. 사진제공= 순창군
순창 삼인대의 비각과 가을 풍경. 사진제공= 순창군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밭에서 의형제를 맺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주로 뜻이 맞는 사람끼리 굳은 다짐을 하고 행동을 같이할 때 빗대어 쓰이는데, 순창에는 세 명의 관료가 모여 결의를 다진 특별한 장소가 있다. 강천산 계곡에 있는 ‘삼인대(三印臺, 3개의 직인을 올려놓은 곳)’로 소나무 가지에 각자의 관인을 걸고 삼인결의(三印結義)를 한 곳이다.

‘순창의 절의정신’으로 칭해지는 삼인대가 생겨난 데에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인 7일 동안 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1487-1557년)와 관련이 있다. 신씨는 신수근의 딸로 1499년(연산군 5년) 13살의 나이에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진성대군(성종의 둘째 아들로 연산군의 이복동생, 훗날 중종)과 혼인했다. 7년 동안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1506년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든 세력에 의해 연산군이 제거되고 새로운 왕을 내세운 ‘중종반정’이 성공하게 된다.

이에 신씨의 지아비인 진성대군이 왕이 되고 그녀 또한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 신수근은 죽임을 당하고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출을 당한다. 그리하여, 신씨는 ‘7일 동안의 왕비’였다가 내침을 당한 폐비로 역사에 남았다. 사실, 그 7일의 시간도 왕비가 된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연산군의 정비였던 폐비 신씨가 그녀의 고모로 아버지 신수근은 중종의 장인이었지만,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하여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자 반정세력의 표적이 되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여파로 신씨는 반정공신인 박원종 등에 의하여 이른바 강제 이혼을 당하고 폐비가 된 것이다.
 

인왕산 치마바위와 온릉(溫陵).
인왕산 치마바위와 온릉(溫陵).

1506년 9월 9일 그녀는 퇴출되었고, 그다음 날인 10일 중종은 새 왕비 책봉을 허락했다. 중종은 새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와 후궁들을 들였지만, 궁 밖으로 퇴출된 신씨는 홀로 지아비를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궁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의 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매일같이 널어놓으며 중종이 자신을 기억하고 불러주길 바랐다 한다. 폐비 신씨의 사연을 담은 그 바위는 지금껏 ‘치마바위’로 불리고 있다.

폐비 신씨의 사연이 더 애처로운 것은,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 윤씨가 아들(훗날 인종)을 낳고 6일 만에 세상을 등지자, 다시 복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순창군수 김정(1486-1521년), 담양부사 박상(1474-1530년), 무안현감 유옥(1487-1519년)은 강천산 계곡에 모인다. 각자 관료로 자리 잡은 그들이지만, 당당하게 할 말을 하고자 폐비 신씨 복위를 청하는데 뜻을 같이하고 관직과 목숨을 내놓는 비장한 각오를 한다. 그 증표로 각자의 관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맹세를 한 것이다. 이들은 다짐하며 작성한 글을 1515년 8월 8일 자 상소문으로 올리는데 함께 결의한 유옥은 부모를 공양해야만 하는 외아들이란 이유로 상의 끝에 상소문 작성자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당시 김정과 박상이 올린 상소문은 임금만이 볼 수 있도록 위아래로 단단하게 풀로 붙여 뜯어 볼 수 없게 봉사(封事, 밀봉하여 왕에게 올리는 의견서)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은 실로 목숨을 건 상소였다. 유교적 명분에 대한 논리를 펼치며 『역경』, 『시경』 등에 나오는 부부간의 예와 도리를 인용하고 “폐위할 까닭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폐위하신 것은 과연 무슨 명분이십니까?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이미 신수근을 제거하고는, 왕비가 곧 그 소출이므로 그 아비를 죽이고, 그 조정에 서면 뒷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바르지 못하게 자신을 보전하려는 사사로움을 위해 폐위시켜 내보내자는 모의를 꾸몄으니 이는 진실로 까닭이 없고 명분도 없는 것입니다...”는 절절한 내용을 올렸다.
 

『조선왕조실록』 중 폐비 신씨 퇴출 기록, 폐비 신씨의 복위를 간한 상소문.
『조선왕조실록』 중 폐비 신씨 퇴출 기록, 폐비 신씨의 복위를 간한 상소문.

이름이 거론된 대신들은 세상을 뜬 자들이었지만,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창하며 폐비를 퇴출한 주동자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문은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중종의 번민과 일부 대신들의 복위 찬성에 대한 의견이 있었지만, 오랜 논쟁 끝에 신씨가 복위되어 아들을 낳게 되면 원자와의 왕위계승이 문제가 되고 후한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자들과 중종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관직을 박탈당한 ‘김정’과 ‘박상’은 귀양을 갔고, 폐비 신씨는 생전에 복위되지 못한 채 중종이 승하한 지 21년이 지난 71세의 나이에 사가에서 숨을 거둔다.

특히, 순창군수였던 ‘김정’은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었지만, 기묘사화에 휘말려 금산과 진도를 거쳐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가 유배를 가며 순창을 지날 적에는 애통해하는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따랐다 하나, 36세의 젊은 나이에 제주에서 사사되었고, 상소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유옥도 35세에 병으로 요절했다. 이후, 1744년(영조 20년)에 이르러 유림과 순창의 선비들이 주도하여 그들이 다짐한 장소인 강천산 계곡에 비문을 세웠고, 김정과 박상 그리고 유옥은 신말주, 신공제, 김인후, 양사형 등과 함께 순창에 있는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또한, 폐비 신씨도 1739년 영조의 명에 의하여 ‘단경왕후’로 추상되어 양주 ‘온릉’에 안치되었다.

가을 강천산은 붉은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옳다고 여기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뜨거운 기상이 서린 삼인대를 품고 있어 더욱 빛이 난다. 삼인대의 비문에는 “강천의 물이여, 동쪽으로 끝없이 흐르도다. 온릉의 나무여, 북쪽을 보고 창창하도다. 돌은 닳아 없어질지라도 선생의 이름은 끝까지 남으리라”고 새겨져 있다. 역사의 풍파 속에서 정의롭게 행동했던 일들은 후세에라도 올곧은 평가를 받게 된다. 하루가 달리 휘몰아치는 요즘의 상황도 그럴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강천산을 찾아 그들의 의로운 행동과 우리의 현실을 반추해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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