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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6. 인심난 김제의 장화리 쌀뒤주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6. 인심난 김제의 장화리 쌀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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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1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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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장화리 쌀뒤주 상세 모습.
김제 장화리 쌀뒤주 상세 모습.

단풍이 한창이다. 내장산을 비롯한 단풍명소들이 북적인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구경도 배부른 다음이라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유독 밥 먹는 것에 대한 속담이 많다. “한술 밥에 배부르랴. 익은 밥 먹고 선소리 한다. 찬밥 더운밥 다 먹어봤다.”란 말이 있다. 이렇듯 밥과 음식이 함께 다룬 주제로는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과 어우러진 나눔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눔에 대한 오래전 기록으로는 충렬왕 때 쌀 100석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남아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각종 문헌에는 공납하는 쌀에 대한 내용과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고 공신들에게 쌀을 상으로 내린 기록들이 많이 있다. 나눔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로는 배고픈 이웃이 가져갈 수 있도록 곡식을 담은 뒤주를 따로 밖에 내어놓은 경주의 최부자와 구례 운조루의 사례가 있는데, 대표 곡창지대인 김제에도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에 걸맞은 훈훈한 유산이 있다.

1976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된 김제 ‘장화리 쌀뒤주’이다. 1864년(고종 1년)에 정준섭이 만들어 사용한 쌀뒤주인데 작은 정자만한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높이 1.8m 너비 2.1m 정방형 목재에 두께 3.3cm의 널빤지를 짜 맞춘 벽체가 초가지붕을 얹은 채 주춧돌 위에 놓여 있다. 그 모양뿐 아니라 커다란 뒤주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다.

뒤주가 자리 잡은 집은 돼지명당으로 알려진 곳으로 선조 때부터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만석꾼으로 불리며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정준섭의 집이다. 인심 좋기로 소문난 집은 지나가는 과객에게도 늘 풍족하게 식사를 대접해 항상 손님으로 북적였다. 쌀 70가마가 들어가는 초대형 쌀뒤주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끼니를 챙겨주다 보니 그 큰 뒤주에 있는 쌀도 한 달 식량으로 모자를 정도였다고 한다.

집안의 후손으로 고택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집에 살고 있는 정주철(1946년생)는 “이 뒤주는 집식구를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잘 나누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들었어요. 집을 찾는 손님을 위한 것이지만, 우리 고장에 흉년이 들었을 때 뒤주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쓰였다지요.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임금이 상으로 지금으로 치면 구례군수인 구례현감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네요. 그 덕분에 사람들이 이 집을 정준섭의 ‘정’ 구례현감을 지냈다하여 ‘구례’를 따 ‘정구례집’이라는 애칭으로 부르지요”라 한다.
 

'고종실록'(1889년 7월 26일)에 실린 정준섭에게 표창하도록 한 기사.
'고종실록'(1889년 7월 26일)에 실린 정준섭에게 표창하도록 한 기사.

그 이야기는 고종 26년(1889년) 7월 26일자 『고종실록』에 “흉년을 당한 때에 재물을 내어 백성을 구한 전 감찰 정준섭에게 표창하도록 한다”는 기사의 제목으로 나온다. “김제에 사는 정준섭이 큰 흉년을 전후하여 1만 3,000냥의 재물을 내어 죽어가던 백성들이 모두 그 덕에 살아났다. 재산을 아끼지 않고 구제한 액수가 매우 많은데, 매우 가상한 일이니 수령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조정에서 표창하자는 의정부의 청을 임금이 윤허하였다.”는 내용이다. 이후 넉 달 뒤인 11월 27일자 『고종실록』에 “정준섭을 구례현감”으로 제수했다는 기록으로 그 사연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제는 후손의 이름을 따 ‘정종수 고택’으로 불리는 집에서 두 내외가 살며 선조들의 정신을 잇고 있다. 원래에는 사랑채와 곳간 옆에 뒤주가 있었지만 1976년에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뒤주를 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안채 쪽으로 옮겼다. 초가의 이엉을 얹는 관리가 힘들어 지붕을 잠시 기와로 한 적도 있지만, 자리를 다시 잡은 뒤로 매년 봄마다 시에서 초가 이엉을 교체해주고 보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쌀을 채우다 세간살이도 종종 넣었던 뒤주는 3년 전부터 뒤주 안을 비운 채 관리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바뀌고 있지만, 쌀을 귀히 여긴 선조들의 정신과 유산은 지역 곳곳에 오롯이 남아있다. 소설가 윤흥길은 “고향 쌀은 고향 바로 그 자체야, 우리네 한국인의 심성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쌀에 대한 관념은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신성한 것이야. 왜냐하면 땅과 쌀과 사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순환관계를 이루고 있는 동일체이기 때문이지. 어제의 땅은 오늘의 쌀이 되고, 오늘의 쌀은 오늘의 사람하고 한 몸을 이루고, 오늘의 사람은 다시 내일의 땅이 되는 법이야. 땅이 곧 쌀이고 쌀이 곧 사람이고 사람은 곧 땅인 그 이치를 최서방 같은 젊은이들이 알 턱이 없지”라는 말을 중편소설 『쌀』에 남겼다.
 

김제 장화리 쌀뒤주.
김제 장화리 쌀뒤주.

소설 속 장인이 사위에게 해준 이 말은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 되어온 우리 선조들에게 종교처럼 자리 잡은 생각이었다. 점차 쌀농사에 대한 비중이 줄고, 쌀의 소비가 예전만 못하다 보니 그 이치를 알 턱이 없는 세상이 되긴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식사를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밥을 먹는다’라는 말로 부르고, ‘밥 먹었냐’는 인사를 나누고 ‘밥이 곧 보약’이며 ‘밥심’이 최고란 말을 한다. 그 힘의 원천이 되는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지대가 만경강과 동진강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수많은 수탈의 흔적까지도 지역의 자산으로 남아있다.

조선의 실학자 이익은 그가 남긴 『성호사설』에 책을 좋아해 날마다 끙끙대며 읽느라고 쌀 한 톨 내 힘으로 장만하지 못하는 자신을 ‘천지간에 좀벌레 한 마리’라 표현했다. 쌀에 담긴 농부의 노고와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겸손함의 표현이겠지만, 햅쌀밥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며 한켠으로 “밥값을 잘 하고 있나”란 생각을 해본다. 가을빛이 사라지기 전에 김제평야만큼 넉넉했던 인심이 깃든 ‘정종수 고택’을 찾아 그 따스함을 배우며 겨울 채비를 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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