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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들의 필사본과 완판본 목판
수도사들의 필사본과 완판본 목판
  • 김은정
  • 승인 2019.11.14 2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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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선임기자

노트커 라베오(Labeo Notker). 950년경에 태어나 1022년에 작고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의 수도사다. 노트커는 소년 시절, 지금은 스위스 영역이 된 장크르 갈렌 수도원에 들어가 일생을 보냈다. 당시 활동했던 수많은 수도사 중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겨진 것은 후세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수도원 교사로 있었던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신학에 관한 라틴어 고전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교재로 활용했다. 그의 번역 실력은 빼어나 고고 독일어를 훌륭하게 구사했으며 본래의 구절을 단순히 해석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덕분에 그의 번역은 독일의 학문적 용어를 만들고 고대 독일어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특히 그는 중요한 고전을 필사본으로 제작했는데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으나 그중 몇 권 필사본은 살아남아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장크트 갈렌 수도원 도서관이 그 소중한 유산을 품고 있는 곳이다. 

당시 유럽의 규모가 큰 수도원들은 별도의 필사실을 두고 중요한 고전이나 성경 악보를 필사했다. 그들 중 하나였던 장크트갈렌 수도원은 16세기 이후 더욱 번성해 17세기 중반에는 최고의 필사 및 인쇄센터를 만들어 전통을 이어왔다. 10세기부터 지속된 수도사들의 귀중한 필사본을 보유 하게 된 이유다. 

이 도서관은 장서만도 15만권. <그레고리오 성가> 필사본을 비롯해 스위스의 국보급 문서와 책도 한둘이 아니다.   

3년 전 장크트 갈렌 수도원 도서관을 찾은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도서관은 들어서는 현관 문 입구에 고대 그리스어로 <영혼의 치유소>라 쓰인 문패를 붙였다. 바로크 양식의 도서관 내부는 다양한 빛깔의 조형물과 조각품을 안고 있는 온갖 구조물, 하늘과 인간이 대화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펼쳐놓은 환상적인 천정화, 빛나는 장서들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중에서도 가슴 뛰게 했던 공간이 있다. 깨알 같은 펜글씨 필사본이 꽉 차 있던 지하 공간이다. 어두운 서고에서 시간을 다투며 필사에 몰두했을 수도사들의 고투가 온몸으로 전해졌던 그때, 문득 십여 년전 전주향교의 뒷마당 장판각에서 습기와 해충과 어둠속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썩어 들어가던 수천 장 전주 완판본 목판(그 뒤 전북대 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져 보관 중)이 떠올랐다.  

여전히 박물관 수장고에 갇혀 있는 목판본의 오늘을 본다. 어느 도시도 갖지 못한 귀한 문화유산의 가치에 우리는 왜 눈뜨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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