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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의 유림(儒林), 격변의 시대에 인륜의 기치를 들다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의 유림(儒林), 격변의 시대에 인륜의 기치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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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21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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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술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주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올가을에도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는 참으로 고운 빛을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전주향교에는 모두 다섯 그루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월당(月塘) 최담(崔湛) 선생께서 심었다는 수령이 430년 된 은행나무도 있다. 은행나무가 향교와 밀접하게 된 것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과 강학하신 공자의 행적 때문이다. 향교가 전통시대 지방의 공립중등교육기관이자 공자를 위시한 유가의 성현들을 제향(祭享)하는 곳이고 보면 은행나무야말로 향교와 딱 어울리는 나무일 것이다. 오늘은 파란 가을하늘에 샛노란 가지를 펴고 수백 년을 우뚝 서온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를 떠올리며 전주의 유림들이 격변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향교를 중심으로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를 살피려고 한다.

 

△위성계(衛聖契)를 조직하여 향교를 재정비하다
 

전주 위성계안.
전주 위성계안.

먼저 볼 자료는 『전주 위성계안(全州衛聖契案)』이다. 위성계(衛聖契)는 성인, 곧 공자의 도를 지키는 계모임을 뜻한다. 표지를 넘기면 ‘선성공자(先聖孔子)’라는 글귀와 함께 공자의 초상화가 맨 처음 보인다. 다음 장에는 ‘유림서사(儒林誓辭;유림의 맹세)’가 있는데 첫째, 인륜을 밝히고 의리를 바루어 인간의 도리를 보존할 것이며 둘째, 성인을 지키고 현인을 보호하여 향교를 유지할 것이며 셋째,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사문(斯文; 유학)을 진흥하자는 세 가지 맹세를 실어두었다.

다음으로는 “위성안현모란분의(衛聖安賢冒亂奮義)”라는 여덟 글자가 책 좌우면에 한 자씩 큰 글씨로 적혀있다. 성인과 현인의 도를 수호하여 난세에도 의로움을 떨친다는 뜻인데 이 글씨는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였던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의 것이다. 기운생동하는 필체에 유학을 수호하고 성인의 도를 구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다음에는 면와(?窩) 이도형(李道衡)이 쓴 두 편의 서문이 실려있다. 첫 번째 서문은 1952년에 쓴 것인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향교가 피폐해져 봄가을 석전대제(釋奠大祭)조차 제대로 거행할 수 없게 되자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이 아들 이도형에게 계를 조직하여 석전대제를 치를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하라 명하였고, 부친의 명을 따라 이도형은 100여 명의 유림들을 모아 계를 조직하게 된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고재 이병은은 간재의 제자로서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병칭되던 큰 학자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버려진 성현의 위패 25위를 수습하여 보전한 공을 쌓기도 한 분이다. 이병은은 계 조직에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고 재산을 불려서 늘어난 재산의 3분의 2로는 봄가을 석전대제를 준비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다시 재산을 불려 전쟁통에 없어진 위패를 다시 만들어 봉안할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두 번째 서문은 1954년에 쓴 것으로 1952년 계안을 만들 때 전쟁중이라 참여하지 못한 인원을 더 참여하게 한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서문 뒤에는 여덟 조항의 조약문이 붙어있는데 계의 의의, 계원의 요건, 기금의 관리와 활용, 임원의 역할 등이 서술되어 있다. 서문 뒤에는 향교에 모셔진 성현을 간략하게 소개한 ‘성현사략(聖賢事略)’이 있고, 다음에는 제사 관련 각종 제문, 계성사(啓聖祠)에 배향된 인물 소개, 계성사홀기(啓聖祠笏記)가 실려있으며 그 다음에는 6개 면(面)의 통문(通文)이 부록되어 있다. 그리고 <계사사월향교중수희사금록(癸巳四月鄕校重修喜賜金錄)>에는 1953년 향교 중수에 필요한 기금을 낸 계원의 이름과 금액이 정리되어 있다.

그 다음부터 책의 마지막까지는 <전주위성계원좌목(全州衛聖契員座目)>이 실려있다. 계원의 성명 아래에 작은 주를 달아 자(字), 본관(本貫), 가계(家系), 거주지, 사우관계 등을 정리하였는데 그 인원이 도합 656명에 달하니 계의 규모는 물론 전주지역 유림들의 활동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위성계의 유림들은 향교를 구심점으로 점점 쇠미해가는 유학을 호위하고 선비의 기상을 떨치고자 하였다.

 

△훌륭한 행실을 포상하여 널리 알리다
 

전주 최씨 포장 문건(은암 최기영, 학인 최우현 부자).
전주 최씨 포장 문건(은암 최기영, 학인 최우현 부자).

향교의 기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풍속에 대한 교화이다. 전주시에서 수집한 통문(通文) 한 점과 최기영(崔基瑛), 최우현(崔宇鉉) 부자에 대한 포상 문건은 유림의 이 같은 사회적 역할을 잘 보여준다. 통문은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 공동의 관심사를 연명하여 통지하던 문서로 유림들의 통문은 ‘유통(儒通)’이라고도 불렀다. 유통 가운데는 서원이나 향교의 건립과 보수, 효자·열녀·충신에 대한 표창 건의, 문집의 발간, 향약계의 조직 등에 대한 내용이 많다. 오늘 살펴볼 통문 또한 임피박씨(臨陂朴氏)의 열행(烈行)에 관한 내용이다. 통문이 담겼던 봉투 앞면에는 전주향교가 발신자로 각 군의 향교와 서원이 수신자로 명기되어 있고, 뒷면에는 통문의 발신일이 1926년 정월 어느 날로 적혀있다. 임피박씨는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켰던 권일헌(權一憲)의 처이다. 박씨 부인은 남편이 병들자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남편의 장례시에는 유감이 없도록 예를 다하였으며 장례를 치른 뒤에는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쌀 한 톨 먹지 못한 채 10여 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박씨부인의 행실에 대해 통문은 “이와 같은 열녀의 절개는 고금에도 드문 일이니 그 보고 들은 바에 대해 침묵할 수 없어서 이렇게 통문으로 알리니 원컨대 여러 선비들이 부인의 열행을 한목소리로 널리 알려서 후세의 부인된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본받도록 할 수 있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며 풍속 교화의 본보기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통문 아래에는 직원(直員) 정성모(鄭性謨)와 장의(掌議) 황의찬(黃義贊) 외 18인의 이름을 연명하였다. 최기영, 최우현 부자에 관한 포상 문건은 호남도지간소(湖南道誌刊所) 유림(儒林) 황의찬(黃義贊) 외 42군(郡)의 명의로 작성하여 대성교숭포부(大成敎崇褒部)로 보낸 것이다. ‘대성(大成)’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곧 공자를 가리키는 말로써 대성교는 1923년 조형하(趙衡夏)를 중심으로 유교의 개혁을 모색하여 창립한 유림 단체이다. 문건은 책자의 형태로 묶여 있고, 책자 가운데 부분에 ‘대성교회지인(大成敎會之印)’으로 보이는 인장이 찍혀있다. 최기영, 최우현 부자는 본관이 전주이고 고려말 충절을 지킨 만육당(晩六堂) 최양(崔瀁)의 후손이다. 최기영은 호가 은암(隱菴)이고 최우현은 호가 학인(鶴人)이다. 문건의 대략적인 내용은 최기영 부자는 오륜을 독실하게 실천하고 학행은 물론 문장도 빼어나 ‘향선생(鄕先生)’이라 불릴 만큼 귀감이 되므로 이들을 포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건의 말미에는 대성교숭포부 교장(敎長) 참판(參判) 김재순(金在珣)과 부교장 서긍순(徐肯淳) 외 12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최씨 포장 문건 내용.
최씨 포장 문건 내용.

△전통시대의 윤리를 다시 음미하다

오늘 소개한 세 자료는 전주의 유림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같은 격변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유림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일제는 향교의 자율성, 독자성을 제한함으로써 유림들의 사회적 역할을 약화시켰다. 밀려드는 서양의 문물제도 앞에서 전통시대의 교육과 가치체계는 구식(舊式)으로 평가절하되어 속절없이 뒷전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위성계안(衛聖契案) 서문에서 “빈 산의 불가(佛家)도 조석으로 예불을 올리고 서양에서 온 예수교도 한 달에 네 번 예배를 올리는데”, “이른바 갓을 높이 쓰고 띠를 드리운 채로 벌레처럼 칩거하고 거북처럼 숨어들어 향교 안에 그림자 하나 없으니 성인을 호위하고 현인을 높이는 마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한 것은 유림 스스로의 각별한 자성을 촉구하는 일갈이었다. 전주의 유림들은 시대의 변화에 맞서 그렇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끊임없이 환기하였고 풍속 교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향교와 유림이 보여준 교화 활동은 한편으론 다시 음미되어야 할 것도 있다. 가령, 남편을 따라 죽은 것을 열행(烈行)으로 기리는 것은 존엄한 생명의 가치로 볼 때, 또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강요된 열행을 두고 볼 때 일방적으로 미화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필자는 전통시대의 가치체계가 무조건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맹목적으로 묵수(墨守)해야 할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여러 윤리적 덕목 안에 내재한 본질적인 가치를 탐색하고 발굴함으로써 오늘날에 더욱 유의미한 가치체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전통과 현대가 생생(生生)하는 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형술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주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김형술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주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김형술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주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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