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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의 태조어진
경기전의 태조어진
  • 김은정
  • 승인 2019.11.21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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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선임기자

전주의 귀한 공간 경기전의 가을이 깊어졌다. 전주의 가을은 이곳, 경기전 은행나무가 제 잎을 노랗게 물들이고 마침내 옷 벗을 채비를 하면 끝을 맞는다. 경기전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을 안고 있지만 은행나무와 함께 깊어가는 가을밤 경기전 풍경은 그 자체로도 귀한 선물이다.

유교를 국교로 택해 예를 중시했던 조선왕조는 그 실천을 위한 건물을 건립했다. 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진전(眞殿)도 그들 중 하나다.

경기전은 조선왕조 개창자인 태조어진을 모신 진전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진전은 전주와 태조가 태어난 영흥, 태조가 성장한 개성,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세워졌으나 모두 불에 타고 경기전의 ‘태조어진’만 살아남았다.

진전은 몇 분의 어진을 모셨느냐에 따라 건축물의 형식이 달라졌다. 경기전처럼 한 분의 어진을 모시는 곳과 선원전처럼 여러 왕의 어진을 모신 곳이 그것이다.

경기전은 당초 ‘태조 어진’ 만을 모신 공간이었으니 다른 진전들과 구별되거나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후 경기전에는 태조 어진과 함께 세종 정조 고종 영조 철종 순종의 어진이 함께 봉안됐다. 경기전 정전(正殿)에 다른 어진들을 함께 모신 것을 두고 경기전이 갖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이라는 비판이 더해졌던 것은 그 때문이다.

어진의 의미도 다르다. 태조어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대의 경기전을 위해 새로 제작된 것들이다. ‘초상화의 왕국’이었던 조선시대 왕들이니 초상이 얼마나 활발하게 제작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전란을 견디고 화재를 피하여 살아남은 어진은 태조와 영조 어진뿐이다. 오늘에 남아 있는 다른 왕들의 초상은 모두가 추정으로 그려진, 이른바 상상도나 다름없는 셈이다.

살아남은 어진 중 태조어진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린 전신상으로는 유일한데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최고봉으로 꼽힐 정도로 그 의미와 가치가 특별하다. 회화사를 전공한 사람들에게 경기전이 성지 같은 곳이었던 이유도 여기 있다.

경기전 안 뒤편 뜰에 어진 박물관이 건립된 이후 정전에 있던 왕의 초상들은 박물관 안으로 옮겨졌다. 전시실은 공간의 역사성을 담지 못했으나 왕의 초상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분주해졌다.

사실 1년 중 대부분 전시실에서 만나는 태조의 초상은 모사본이다. 진본 보존을 위해 1년에 한번, 20여 일 동안만 공개되기 때문이다.

태조어진 진본이 지금 공개되어 있다. 27일까지 어진박물관을 찾는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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