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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9. 드루와 전킨 선교사가 남긴 유산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9. 드루와 전킨 선교사가 남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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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2.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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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소로 사용한 드루의 집(상)과 여배와 교육의 장소로 사용한 전킨의 집(하). 출처= 전킨기념사업회
진료소로 사용한 드루의 집(상)과 여배와 교육의 장소로 사용한 전킨의 집(하). 출처= 전킨기념사업회

일제강점기 망국의 설움에 젖은 선조들의 손을 잡아준 벽안의 사람들이 있다. 그중, 미국인 드루(A, D, Drew, 한국이름 유대모, 1859-1924년)와 전킨(W. M. Junkin, 한국이름 전위렴, 1865-1908년)은 선교사로 들어와 의료와 교육 활동으로 지역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군산은 조선시대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뱃길을 이용한 물자수송의 주요 거점이었지만, 1899년 개항하기 전까지는 작은 고을이었다. 당시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온 경로는 주로 배로 닿을 수 있는 곳이었고, 그들이 군산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물포인 인천과 부산에서 뱃길로 들어오기 쉬운 호남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배 안에서 군산을 처음 바라본 초창기 개척 선교사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땅 이구나”라고 감탄을 하며 군산에 상륙하여 호남에서 선교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1893년부터 선교사 레이놀드를 필두로 하여 군산을 통해 들어온 선교사들은 군산에서 전주로 이어지는 지역을 따라 선교답사를 했다. 당시 선교사들을 통역하며 한국어를 가르친 정해원은 전주 은송리에 26불을 주고 집 두 채를 매입하여 선교사를 맞이하였으며, 장터와 거리에 나가 전도를 하여 호남에서 복음을 전도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1894년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한 드루는 이듬해 합류한 전킨과 함께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군산과 전주는 그들의 종파인 남장로교 호남선교의 시작지점이었고, 특히 의료와 교육 선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의 선교활동은 레이놀즈 선교사가 주도하였으며 교육 선교는 전킨이, 의료 선교는 드루가 주관하였다.

그러던 중,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여 서울로 잠시 돌아갔다가, 1896년 전킨과 드루의 가족이 군산으로 이주하면서 군산 선교부가 정식 개설되었다. 두 선교사 가족은 군산 수덕산 기슭에 초가집 두 채를 얻어 사람들을 선교했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전북과 충남 지역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궁멀마을과 드루(상단 왼쪽)와 전킨(상단 오른쪽) 선교사. 출처= 전킨기념사업회.
궁멀마을과 드루(상단 왼쪽)와 전킨(상단 오른쪽) 선교사. 출처= 전킨기념사업회.

드루는 미국에서 약학과와 의학부를 졸업한 선교사로, 가난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드루는 1896년 한 해 동안 270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약 600건의 간단한 시술을 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아주며 선교 활동을 하던 중 남장로교 선교부가 군산에서의 철수를 결정하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드루의 반대로 오늘날 구암동인 궁멀(거북이 마을, 궁말)로 거처를 옮기며 군산에서의 활동이 이어졌다.

궁멀로 간 드루는 배를 마련하여 고군산과 금강을 따라 김제, 강경, 익산까지 찾아가 전도하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곳에서 궁멀교회와 훗날 일제가 구암병원으로 부르도록 한 야소병원이 시작되었다. 예수의 한자어 ‘야소(耶蘇)’를 딴 야소병원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1940년대 문을 닫았고, 구암병원의 이름은 한국인 의사들에 의해 198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내가 누워있으면 조선인이 죽어간다”는 말을 하며 무리한 탓에 몸이 쇠약해진 드루는 미국 선교부의 명에 따라 치료차 1901년 귀국했으나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드루가 펼친 사랑은 이 땅에 오롯이 남아있다.

전킨은 판사의 아들이자 신학을 전공한 미국인으로 부인 메리 전킨(한국명 전마리아)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부부선교사는 군산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어린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 속에서도 영명학교를 세우며 지역에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 교육을 통한 선교는 메리 전킨과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자택과 예배당에서 성경과 일반 교과를 가르치면서 시작됐다. 학생이 늘어나자 1902년 선교부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을 나누어 가르쳤다. 그것이 1919년 3월 5일 ‘호남 최초로 3.1 독립운동’을 시작한 영명학교의 시작이었다.

메리 전킨을 중심으로 시작된 영명여학교는 멜볼딘(메리볼딘)여학교로 불렸다. 멜볼딘여학교은 ‘3.5 만세운동’이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심해지자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폐교했다가 이후 영광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전킨은 남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영명남학교는 1909년 안락소학교와 영명중학교로 확대되었다가 같은 이유로 폐교되었지만, 해방 후 복교되어 군산제일고등학교가 되었다.

과로로 쇠약해진 전킨도 선교부로부터 전주로 사역지를 옮기고, 20리 반경 안에서만 활동하도록 명령받았다. 하지만 전주서문교회를 맡고,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강행군을 펼치다가, 1907년 성탄절에 폐렴이 걸려 1908년 1월 2일 향년 43세로 별세했다. 이듬해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 전주여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 ‘기전여중학교’로 개명하고 메리 전킨이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전킨의 유족은 전주서문교회에 종을 기증하였고 종탑 안에 종은 그의 행적과 더불어 지금도 남아 큰 울림을 건네고 있다.
 

군산 수덕산에 위치한 두 선교사의 기념비.
군산 수덕산에 위치한 두 선교사의 기념비.

두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첫 도착지인 옛 군산세관 앞과 활동지였던 수덕산에는 기념비와 작은 공간이 세워졌고, 전킨의 유언에 따라 구암동산에 묻혔다가 전주선교사묘역에 잠든 전킨의 묘비 아래에는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난 세 아들의 작은 묘석도 자리 잡고 있다. 연말이 되니 우리 지역에서 숭고한 삶을 산 그들의 발자취에 마음이 닿는다. 그 선한 영향을 이어 추운 겨울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나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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