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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조계현 기아타이거즈 단장 “전북야구 발전 도움 되는 일 언제든 팔 걷겠다”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조계현 기아타이거즈 단장 “전북야구 발전 도움 되는 일 언제든 팔 걷겠다”
  • 김원용
  • 승인 2020.01.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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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배 힘 합쳐 군산야구 발전 위한 추진위 발족 준비 중
전북 연고 프로구단 탄생 못해 안타까워
기아, 군산 연고 구단 아니어서 당분간 홈경기 어렵다
조계현 기아타이거즈 단장
조계현 기아타이거즈 단장

군산상고는 걸출한 야구스타들을 즐비하게 배출했다. 군산이 야구도시로 명성을 쌓은 것도 군산상고가 있어서다. 특히 1972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9회말 5대4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얻은‘역전의 명수’는 오늘날까지 유효한 군산상고의 별칭이 됐다.

김봉연·김준환·김성환·김일권 같은 대형 스타들이 1970년대 군산상고를 전국적인 야구 명문학교로 올려놓았다면, 조계현이 1980년대 황금기를 열었다. 군산상고가 가장 많은 전국대회 우승을 이룬 것도 조계현이 활약했던 1980년대 초였다. 조계현은 1981년 1학년 때 팀을 대통령기 우승으로 이끌며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고교 때 혹사당한 팔 때문에 대학시절(연세대)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했던 조계현은 프로에 진출한 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전남북 연고로 출범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군산상고 출신이 주축을 이뤄 전성기를 누렸고, 해태의 마지막 전성기에도 조계현이 버티고 있었다.

선수 은퇴 후 여러 구단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던 조계현은 선수 때만큼의 명성을 쌓지는 못했다. 그렇게 잊혀져가던 그가 2017년부터 기아타이거즈 단장을 맡아 새로운 야구인생을 펼치고 있다. 선수시절 ‘팔색조’‘싸움닭’ 등 여러 별명을 얻을 만큼 많은 열성팬들을 몰고 다녔던 조 단장(56)을 만나 그의 야구인생을 들어보았다.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요즘 안방극장을 달구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단장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역할로 나오는 데, 실제 어떻습니까.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지요.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감독 중심의 야구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는 오래 전부터 제너럴 야구, 즉 단장 중심으로 운영됐는 데, 우리도 최근에는 구단 야구로 가는 추세 입니다. 감독은 구성된 선수를 갖고 최고의 실력을 내도록 하고, 단장은 선수 영입부터 선수 육성 등 중장기 플랜도 세우는 임무를 맡는 게 메이저리그 형태로 말이죠.”

 

-기아타이거즈 최초로 선수 출신의 단장이 됐습니다. 어떻게 단장으로 발탁됐습니까. 또 선수 출신 단장의 강점이 있다면.

“선수와 지도자 생활 대부분을 타이거즈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구단과 선수 사정을 잘 알 것으로 평가한 것 같습니다. 기아에서 지난해 미국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을 영입한 만큼 감독 및 선수단과 호흡을 맞추는데 선수 출신 단장이 강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고교와 프로야구 시절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는다면.

“1982년 한일 고교야구 정기교류전에 뽑혀 일본에 갔을 때 교포 할머니께서 떡을 가져온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로 반일 감정이 고조됐을 때인데, 꼭 이겨달라던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봉황기·청룡기 대회를 우승한 뒤여서 피로가 누적됐으나 3차전 모두 출전해 2승 1세이브를 거뒀습니다.”

 

-고교 때와 달리 대학 시절 별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고 2때 하루 12시간씩 연습을 했어요. 봉황기 결승에서 만난 천안 북일고와 12회 연장까지 가서도 승부를 내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연장전 혈투를 벌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던지며 전년도 패배를 설욕하고 우승을 했지만, 쇄골 골절 부상을 겪어야 했어요. 이후 운동을 거의 못해 저에게는 지옥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한물간 선수로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보다 제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더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대학시절의 공백을 딛고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까.

“88년 프로 입단 대신 농협 실업팀을 선택할 때 야구를 그만둘 경우 평범한 직원으로라도 남고 싶어서였습니다. 훈련 방법을 바꾸고 별별 방법을 동원하고서도 속도가 나오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렇게 5~6년 고민했던 문제가 참으로 우연치 않게 풀렸어요. 훈련을 하면서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특별했어요. 140킬로 중후반 속도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100개를 피칭했는데 계속 그 속도가 나왔어요. 집에 가서 많이 울었고, 설렘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더는 투수 생활을 못할 줄 알았던 때였기에 그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선수로 활약할 당시 강타자와 대결에서도 피하지 않고 배짱투구로 지금까지 많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프로야구 시절 가장 전성기로 꼽는다면.

“해태 선수시절 한국시리즈에서 5번 우승했습다. 당시 선동렬·이강철 등 쟁쟁한 멤버들이 활약할 때였죠. 특히 93년도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해였습니다.”

 

-조 단장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을 꼽는다면.

“야구에 입문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었던 문철웅 선생님이셨습니다. 76년 대통령배 우승의 주역이었던 군산상고 김용남 선배를 보면서 목표가 생겼고, 고교 1학년 때 부동의 국가대표 1번 타자 김일권 선배가 자신이 입던 국가대표 옷을 주며 꼭 국가대표가 되라는 격려가 큰 힘이 됐어요. 고 최동원 선배는 저의 롤모델이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군산상고 야구 성적이 저조 합니다. 2000년부터 10년간 전국대회 우승이 전무했으며, 최근의 가장 좋은 성적이 4년 전 전국체전 우승이 고작입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보는지.

“야구할 수 있는 조건은 잘 갖춰져 있다고 봅니다. 시민들의 열성어린 응원이 무엇보다 큰 힘이죠. 현재 모교야구동문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선후배 동문들을 중심으로 군산야구위원회 발족을 준비 중입니다. 엘리트 야구와 사회인 야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전주와 익산을 연계해 전북 야구발전의 디딤돌을 놓고 싶습니다.”

 

-기아타이거즈에 대한 전북 팬들이 많습니다. 기아타이거즈는 한 때 군산 월명야구장을 제2의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매년 4~9경기를 가졌지만, 지금은 군산경기가 없어졌습니다. 군산 경기를 재개할 계획은 없는지.

“광주 홈경기를 치를 때 30% 정도가 외지에서 찾고, 그 절반 가까이가 전북 팬일 만큼 기아에 대한 전북 팬들이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연고제 시행에 따라 전주고와 군산상고 출신 지명권이 경남 연고의 NC가 갖고 있어요. NC를 제치고 기아가 군산에서 홈경기를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21년 이후 도시연고 대신 전면 드래프트제 시행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나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전북 야구팬들의 갈증 해소는 당분간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전북은 야구 열정이 높은 고장입니다. 전북연고 구단인 쌍방울레이더스가 SK로 넘어갈 때 지역연고지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쉽고, 10구단 창단 때 기회를 잡지 못한 것도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11구단, 12구단을 만들어 양대 리그로 갈 수도 있을 텐데 도민들의 열망과 의지의 결집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에 대비해 야구장 신설이나 리모델링에 대한 관심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선수시절이나 지도자 때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단장으로서 팀을 탄탄하게 만들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 올인 할 것입니다. 그 다음 무엇을 할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북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야구는 저의 모든 것이었고, 제 인생을 풍요롭게 해줬습니다. 많은 사람과 공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많은 경험을 갖게 한, 무한히 감사한 존재입니다. 그런 야구를 내 곁으로 오게 한 것이 고향입니다. 제 마음에는 늘 고향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북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언제든 팔을 걷겠습니다.

 

◆ [조 단장의 선수시절 뒷이야기] 덩치만 큰 평범한 소년에서 야구 전설이 되기까지
 

조계현 단장.
조계현 단장.

고교 야구와 프로야구 판을 흔들었던 조계현이 처음부터 야구천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그저 덩치 큰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가 야구에 발을 디딘 것은 해체된 군산남초등학교 야구팀이 재창단되면서였다.

학교는 야구 실력 등을 따질 겨를 없이 신체적 조건을 따져 선수를 모았다. 조계현도 담임의 안내와 동기인 백인호(기아 타이거즈 3군 코치)의 추천을 받아 합류했다. 당시 코치는 모교 출신의 ‘스마일 피처’ 송상복이었다.

고무신 신고 나온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58명이 지원해 훈련을 시작한 1주일 뒤에는 18명만 남았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야구팀에 남기는 했지만, 조계현은 야구자체에 취미가 없었던 데다 소질 또한 보이지 않았다. 1루수 포지션이었는데 타격과 수비 모두 형편 없었다”. 너무 못해 민폐였다. 부끄러웠단다.

4학년 여름 방학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아예 빠졌다. 그런 그가 야구를 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최규거 당시 교장이 선수들에게 사비로 육성회비를 지원해주면서다. 5학년 때 투수로 전향하면서 그의 실력도 일취월장 했다. 6학년 때 이르러서는 게임을 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천하무적 팀이 됐다. 백인호 고장량 한경수 등이 당시 주축이었다.

조계현과 관련해 또 하나의 베일에 쌓인 이야기가 있다. 1982년 한일 고교야구 정기교류전에서 3차전 경기 마운드 책임을 그가 도맡은 것을 두고 당시 교류전 감독이 경북고 감독이어서 라이벌 팀 에이스를 혹사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조 단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승부욕이 강했던 자신이 자원해서 나선 것이란다. 별명 ‘싸움닭’이 말해주듯 그는 지는 것을 못 참는단다. 무엇이든 자신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프로야구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거쳐 단장직을 맡고 있는 지금도 살아 있어 보였다.

 

-프로야구 이력

△해태 타이거즈 입단(1988년 1차 1순위)

△해태 타이거즈 (1989~1997)

△삼성 라이온즈 (1998~1999)

△두산 베어스 (2000~2001)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 (2003~2005)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6~2008)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8, 베이징 올림픽 우승)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 (2008~2009)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 (2010~2011)

△LG 트윈스 수석코치 (2012~2014)

△KIA 타이거즈 수석코치 (2015~2017)

 

/김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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