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0-12-04 18:45 (금)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1. 목숨을 건 놀이, 석전(石戰)의 기억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1. 목숨을 건 놀이, 석전(石戰)의 기억
  • 기고
  • 승인 2020.01.30 19:4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준근의 '기산풍속도' 중 석전하는 모양(덴마크 코펜하겐국립박물관 소장).
김준근의 '기산풍속도' 중 석전하는 모양(덴마크 코펜하겐국립박물관 소장).

설 명절을 보내고 나니 새해의 날이 한 달이 지났다. 작심삼일 등 여러 말들이 있지만, 아직 신년다짐을 이어가기에는 늦지 않은 시기이다. 그렇다 보니 우리 선조들은 설에서 정월 대보름에 이르는 시기에 액을 막고 복을 맞는 다양한 민속놀이를 즐겼다. 그 풍습이 전승되어 지금도 정월 대보름에 부럼을 깨고 오곡밥을 먹고, 더러는 달맞이 놀이를 하지만, 오래전 기억 속 까물거리는 풍속으로 목숨을 건 놀이인 ‘석전(石戰)’이 있었다.

석전은 패를 갈라 돌팔매로 승부를 겨루는 돌싸움으로 하천 변이나 들판에서 주로 성행했던 놀이다. 사실, 전쟁이라 붙인 한자어를 봐도, 돌을 던지고 싸우며 논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석전을 하다 다치는 경우가 허다했고 죽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치열하게 석전을 치른 이후 승패가 갈리면 죽거나 다쳐도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니, 요즘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놀이이다.
 

영국 잡지 'The Graphic' 1902년 2월 8일 자에 실린 석전 풍경.
영국 잡지 'The Graphic' 1902년 2월 8일 자에 실린 석전 풍경.

우리 고장에서 성행한 석전에 관한 이야기를 더러 접할 수 있는데, 단오에도 석전을 했다지만, 정월 대보름 횃불놀이를 하다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번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횃불놀이의 채비는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싸움용 홰를 만들면서 시작된다. 싸리나무나 빗자루 사이사이에 송진이 많이 붙어있는 소나무 가지나 그루터기를 촘촘하게 박고 기름을 듬뿍 먹인 솜뭉치를 꼬아 불심지를 만들어 단단히 맨다. 불을 붙이고 휘둘러도 횃불이 꺼지지 않도록 여러 방법을 쓴 것이다. 주로 마을 대항으로 벌어지는 편싸움인지라 마을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하천이나 들로 나가 상대 마을 사람들의 약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싸움을 건다.

홰를 들고 앞서 나가는 사람을 ‘홰꾼’이라 불렀으며, 보름달이 떠오르면 홰에 불을 붙여 휘두르며 싸웠다. 진안 백운면 마을 간의 ‘홰싸움’이 치열했고 남원의 횃불싸움은 인월의 ‘달집 태우기’와 더불어 유명하다. 고창의 ‘댓불튀기’도 대나무를 태우는 소리가 ‘타다타다닥’ 요란하게 나 놀란 잡귀가 도망가라고 집 마당에서 댓불을 피우는데, 인월의 달집 태우기는 커다란 달집을 태우면서 대나무를 타는 소리와 불의 모습이 장관이다. 댓불튀기나 달집 태우기며 횃불놀이 모두 다가오는 액을 쫓고 무사태평과 풍년을 비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남원 인월의 달맞이.
남원 인월의 달맞이.

횃불놀이는 편을 갈라 치열하게 싸워 횃불싸움이라 불리었고, 그 싸움에서 자기편이 질 기미가 보이면 돌을 던져 합세하며 돌팔매 싸움으로 번졌다. 이 싸움에서 이긴 마을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먼저 확보하고 상대 마을의 산에서 풀을 먼저 벨 수 있는 권한을 가지니, 농사가 근본인 마을에서 그 내기가 걸린 싸움은 목숨을 걸듯 치열했을 것이다. 순창에서는 마주 보는 복실리와 장덕리의 석전이 정월 대보름마다 들판에서 열렸고 전주에서는 삼천과 전주천 변에서 패를 갈라 동네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치러진 석전이 떠들썩했다.

석전의 유래는 고대 전투에서 생겨난 것으로, 중국의 오랜 세시풍속으로 성행했으며, 돌에 맞아 피가 흐르면 그 집에 행운이 오고,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을 태운 뼈를 논밭에 넣으면 풍년이 든다 하여 이긴 편에서 그 재를 나눴다는 설도 있다. 우리 선조들은 석전인 돌팔매 싸움을 석전희(石戰戱), 편전(便戰), 변전(邊戰), 척석희(擲石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고구려 임금도 즐겼다는 석전에 관한 기록이 중국 역사서인 『수서』에 신라 돌팔매 부대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으며, 고려 때에는 여진 정벌의 핵심 부대에 돌팔매군을 편성했고 백성들 간에 석전이 성행했다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영조시기 석전의 폐단과 석전금지에 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영조시기 석전의 폐단과 석전금지에 관한 기록.

조선시대에 들어 태종, 세종을 위시한 왕들이 백성들의 석전을 보고 난 뒤, 돌팔매 부대인 척석군(擲石軍)을 정규부대로 편성해 군사적 목적으로 돌팔매 기술을 사용했고 실전에서 왜구를 격퇴하며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석전을 즐기다가 부상자가 많이 나자 세종은 석전을 금지시켰다. 영조 시기에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 관행을 이용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 적발되는 등 폐단이 속출하자 가장 강력한 금지령을 내렸지만,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미개한 풍습이라며 금지하기 전까지 성행했다.

일제가 금했던 이유는 작게는 수십 명 크게는 수백 명이 패를 갈라 돌을 던지며 싸우는 모습이 위협적으로 보였고, 선조들의 전투훈련 방법으로 실전에 응용된 것을 파악하고 철저하게 금지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살벌한 분위기로 치열하게 싸워 돌에 맞아 다치거나 죽어도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고 끝나면 쌓인 감정을 푸는 그 호방한 기질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까지 성행했고 금지된 기록은 당시의 신문을 비롯해 『경도잡지』와 『동국세시기』에 정월 대보름날 풍습인 석전의 설명으로 남아있으며, 이탈리아 총영사인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도, 석전을 구경하던 미국인이 자기 주위에 떨어진 돌을 되던져 한 사람이 죽어 추방되었다는 외국인 참여 기록을 남겼다.

이제는 돌팔매 싸움을 했다는 무용담을 듣기 힘들고, 들판이나 천변에 나가 구경했다는 어르신도 많지 않다. 몇 해 전부터 전주시가 관련 기록을 찾고 있지만, 수집하지 못했다. 이제 마을의 명예를 걸고 피가 터지도록 치열하게 석전을 했던 기억들은 정월 대보름의 달빛 전설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석전을 치르며 마을의 안위를 지키려 했던 그 마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탈호남희망이주비내놔 2020-02-09 04:14:03
지역 성씨 족벌 사회라~~~~~마을간 세력 싸움에 감정이 깊었다. (어느 마을에 누구네 누구가 어쩌고 저쩌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오늘날로 합법적 패 싸움을 허용해 준것이다. 해소차원에서. 지역감정 옛날부터 있었다.
지역감정이 없을 수 없다. 옛날에도 지역간 발전, 지역인재 등용수, 지역 성씨 족벌 싸움, 지역 예산 이권 등등
오늘날 하고 똑같다. 더구나 옛날엔 삼국시대 지주들이 세습을 거듭하며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경상도는 신라회라고 유지하고 있고 굉장히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