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 내려앉았습니다. 안개에 가려진 세상이 백내장처럼 희미합니다. 파도는 갈기를 세워 달려들고 바람은 마구 뺨을 갈깁니다. 바람 앞에선 날개를 접어야 하느니, 움츠린 갈매기 떼가 몸으로 증명합니다. 백사장에 그림자 하나 없습니다. 그 많던 발자국을 파도가 다 지워버렸습니다. 수평선에도 돛배 한 척 없습니다. 파도에 밀려 몇 발짝 물러섭니다. 이발소 그림은 이발소에나 걸려있겠지요.
막막할 때면 망망한 곳을 찾곤 하지요. 답답한 세상을 욱여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끙끙 산에 오르는 건, 길 아닌 길을 지우기 위해서지요. 주저앉으면 그만 길이 끊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철 지난 바닷가를 찾는 것도 한가지일 겁니다. 지난 여름 잘못 찍은 발자국, 파도가 지워버린 그 발자국에 안심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먼 수평선 너머로 뱃머리를 돌리기 위해서일 겁니다. 사생결단 달려들던 파도가 잠시 물러서는 걸 봅니다. 갈매기도 지금 날아오를 순간을 헤아리고 있겠지요. “바다는 입으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일로 말하는 자”라 최남선이 말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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