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0-03-29 20:33 (일)
위대한 지성 폴링 교수와의 만남
위대한 지성 폴링 교수와의 만남
  • 기고
  • 승인 2020.02.16 1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미국 유학 중이던 필자가 박사 학위논문 마무리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1984년 3월의 일이다. 화학과 교수였던 피터 디바이(Peter Debye) 탄생 100주년 기념세미나에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 한스 베데(Hans Bethe), 폴 플로리(Paul Flory), 로알드 호프만(Roald Hoffmann) 교수 등이 참여한다는 벽보를 보았다. 모두 교과서에 소개되는 노벨상 수상자들이다. 그중 단연 눈길을 끈 분은 폴링 교수님이셨는데, 인류사에서 유일하게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 단독 수상자로서 과학계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추앙을 받던 분이다. 1901년 출생했으니 당시 80세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중 강연을 왕성하게 펼친다고 했다. 캠퍼스 구내서점에서 그분의 명저서 『화학결합의 본질(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이란 책을 두고 고민고민 하다가 ‘가보(家寶)니까 비싸도 싸지’라고 위로하며 사들고 강연장을 찾았다.

대형강의실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강연자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강연 후에도 숱한 질문이 이어지고 청중에 둘러싸여 있어서 서명은커녕 접근하기도 어려웠고, 나는 나대로 바빠서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1954년 라이너스 폴링에게 노벨화학상을 가져다 준 대표업적은 분자구조를 이루는 화학결합에 있어서 원자궤도(orbital)의 혼성화(hybridization)와 공명(resonance) 등에 관한 개념을 정립한 것이다. 원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결합 방식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폴링은 복잡한 유기화합물이나 전이금속화합물의 구조를 설명 가능케 하여 물리화학의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과학자로서의 업적도 빼어나지만 폴링을 더욱 위대하게 만든 것은 반핵운동, 평화운동을 선도했다는 점이다. 세계에 전쟁의 포화가 자욱하던 1940년대, 미 당국은 원자폭탄 개발을 목표로 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화학부문 책임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폴링은 단호히 거절한다.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이 끝나자 오히려 반핵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이로 인해 미 정부에 반국가적 인물로 찍혀 학회 참석조차 금지 당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폴링은 1955년 아인슈타인 등 5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대열에 앞장섰으며, 1957년부터는 대기 중에서의 핵실험을 금지하는 서명운동에 과학자들의 동참을 권유하는 한편 일반 대중에게 핵실험의 위험성을 홍보하는 데 진력했다. 결국 1958년 49개국 11,000여명의 과학자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유엔에 제출했으며,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No More War)』라는 책을 통해 과학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반핵·평화운동에 헌신한 공로가 인정되어 196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왓슨’과 ‘크릭’ 등이 DNA 구조해석에 관한 업적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는데, 왓슨은 자서전에서 폴링이 이 상을 놓친 것은 미 정보당국이 자행한 출국금지 조치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노벨상 3관왕의 위업이 무참히 사위어간 것이다.

과학자도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세계평화와 사회발전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폴링의 인류애에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 필자가 에너지전문가로서 에너지절약과 신·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을 전파하기 위해 강연회나 대중매체에 출연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는 것도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온 국민이 과학·기술 친화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야 하고, 그 일에 과학·기술인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폴링의 가르침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속적인 일로 방황할 때마다 연구실 서가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폴링의 그 책을 응시하며 치열하게 살던 그 시절을 떠올리고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을 다짐하곤 한다.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