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0-03-28 16:41 (토)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0) 높은 뜻, 시를 읊고 서 있는 나무 호은(壺雲) 박항식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0) 높은 뜻, 시를 읊고 서 있는 나무 호은(壺雲) 박항식
  • 기고
  • 승인 2020.03.19 2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눈물로 화하여 방울방울 떨어지는 구름같은 시인
한 생애 문학 사랑 이쁜 고집으로 도라지꽃 피워
각(覺)의 세계와 정령성 교감 통해 서정미학 추구
호은(壺雲) 박항식.
호은(壺雲) 박항식.

문학관의 하얀 목련이 하늘로 피어오르는 봄밤, “투명한 고독, 혹은 가릴 수 없는 마음”으로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운 박항식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짧은 질문 속으로 긴 호흡의 침묵은 고요했다. 그리고 가만가만 깊은 기억의 장을 펼쳤다. 그는 호운 선생님을 대학교 학부시절에 ‘만경강 문학 동인회의 지도교수님으로 모시게 되었단다. “선생님은 섬세하고 날카롭고 자신감으로 고집도 강하시고 또 그만큼 고독하셨으리라 생각”한다며 지금까지 가장 존경하는 분이고, 시인이 되는 가르침을 주었던 선생님의 따뜻한 정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호운 박항식(朴沆植, 1917~1989)은 “나의 號 ‘壺雲’에 대하여” 설명한 바 우리나라 지리산을 방호산方壺山이라고 한다. 智異山 발치인 南原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號를 方壺, 方壺山人, 壺雲으로 한 것이요, 詩集을 『方壺山 구룸』이라 이름하게 된 것인바, 『列子』 湯問篇의 故事와도 因緣맺기에 이르른 것이다.

호운은 1917년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어릴적 일찍 아버지를 여위었고, 전주농림고등학교(1949)를 다녔다. 『한성일보』 신춘문예에 「눈」이 당선되었고(1949), 남원에서 수지중학교를 설립하여(1951~53) 초대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원광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였으며(1953~64), 호남문학회 회장을 엮임하였다(1960~64). 『경기신문』 신춘문예 시조부에 최우수상(196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에 당선(1967)되었다. 한국언어문학회 회장을(1972~74) 지냈으며, 이후 동국대학교에서 「동서문학 수사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를 받았다(1975).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엮임 후 영면하기 전까지 익산에서 46년 동안 활동했다.

저서로는 시집 『白砂場』(1946), 『流域』(1959), 『方壺山 구룸』(1981)과 시조집 『老姑壇』(1976)이 있으며 가족동시집 『다람쥐와 꽃초롱』(1981), 『수사학』(1976)과 『시의 정신차원』(1985)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호운 박항식 박사 고희기념문집(1987)이 간행되었다. 이후 2005년 5월 13일 남원 교룡산성 공원에서 박항식 박사 시비 「도라지꽃」이 세워졌다, 여기에 김동수 시인은 “기라성 같은 원광문인들을 길러 한국 문단에 새로운 사단을 형성한 선생은 정갈한 언어와 심원한 동양적 사유가 정교하게 어우러진 서정 미학으로 한국시사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주었다고 펑가받고 있다.”라고 썼다.
 

호운 박항식 시인 작품.
호운 박항식 시인 작품.

그의 첫 번째 시집 『유역』에서 「미호천美湖川」은 시대적 비극인 6·25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오라기! 베를 날면서 흐르는 미호천”은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뿔뿔히 헤어졌던 수천 각색 살림살이”가 마침내 흘러서 맑아지는 미호천으로 평화의 꽃 잎을 띄우며 흘러가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애환이 표상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라기마다 고운 마음을 담아 길고 구비진 사연을 이루어가는 어머니 손길처럼 매듭진 것도 풀어 이어 이루는 미호천”이여 “자비하신 어머니처럼” 흘러가 “동이 트는 아침에 빛나는 얼굴로 기쁨을” 기다리는 시적 화자의 심상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호운은 「現代詩小考」에서 현대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예술운동의 대표적인 것으로 추상주의(형식주의의 화화 계통)와 초현실주의(환상예술의 계통)를 인식함을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의 사유는 시들의 표현과 정신세계를 내용으로 담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20년 프랑스의 예술가 ‘마르셀 뒤샹’이 도자기로 된 변기를 ‘분수’라는 제목으로 전시한 적이 있는데, 자신을 소변기 샘의 영혼과 동격으로 놓은 것으로 초현실주의파에 있어서 상징적으로 작용되는 오브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호운의 시론 「나의 詩에 대한 見解」에는 두 가지 시론을 설명하고 있다. 시 속에서 언어를 추방하려고 들었던 뽈 발레리의 순수시론純粹詩論과 시 속에서 문학을 배제하려고 주장하였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상형象形(그림의 형식을 통한 시) 이다. 먼저 호운은 아폴리네르의 영향을 받아 그의 시 「코스모스」와 「안개」 작품을 쓰면서 주제에 맞도록 문장을 도형화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상형에 영합한 것으로 글꼴과 문장 모양, 행간 등으로 시각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언어에는 의미를 전달하는 작용과 감동을 전달하는 작용이 있는데, 다음의 작품에서 살펴보자.

“인생은 떠다니면서도 지상에 집을 지니고 살 듯이 구룸은 해맑은 창공에 부리를 내리고 부평초같이 고요히 떠나간다.// 눈동자 초롱한 변두리를 길어올리면 거기서 눈물이 솟기듯이 구룸은 가장 해맑은 생각은 물이다.// 물이 환상에 불타서 피어오르는 구룸 구룸은 이제 그의 물길을 간다.// 가다가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정이 되면 눈물로 화하여 방울방울 떨어지는 구룸//(…) 인생이 구룸을 보는 깨끗한 마음으로 구룸은 또 인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쉬지 않고 흐르는 습성으로 가다가 가다가 마침내 구룸과 인생은 서로의 모습을 바꾸는 물에서 만난다.”( 「구룸」, 부분)

위 작품에서 호운은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사유를 인지한다. 순수시의 요건은 감동을 주는 것인데, 이는 시를 구성하는 순수시의 시도이며, 시 속에서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에서 감동은 視·聽·覺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운의 시집 『方壺山 구룸』은 視·聽·覺으로 표상되는데, 주조는 ‘각覺’이 될 것이다. 이처럼 호운의 시와 시조에서의 공통점은 감각성을 중시했다.

山 속에 속속들이 처녑 속 깊은 山이/ 나무 나무 나무들이 서로 어깨 싸고 서서/ 頭流千年 壯한 듯을 몸짓으로 나토니라// 눈에 보이잖은 실날 같은 사연들이/ 골짜구니 세세구비 이야기를 모아다가/ 蟾津江 띠를 둘러서 가고 오고 흐르니라// 山이야 江물이야 하늘 푸른 靑鶴洞에/ 백닥이 전나무처럼 살고 말라 서서/ 푸르러 사는 이치를 지켜보고 싶구나.( 「老姑壇」, 전문)

호운의 시조집 『노고단』을 연구한 김광원은 “호운은 음성상징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음성상징어의 사용은 시의 감각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시는 감각성과 관련하여 정령성을 띠게 된다. 여기서 ‘정령성’이란 사물과의 감각적 교감을 통해 얻어지는, 영속성을 지닌 맑고 투명한 영혼성을 의미한다. 시의 내용은 조화와 평등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시조에는 불교적 경향을 띠고 ‘각’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밤에 마시고 아침에 후회하는 사람같이 눈은 내린다. 후회의 빛깔은 먼 회색이면서 가까운 백색이다. 눈은 혀가 깔깔하지 않은가? 마시고 후회하는 사람을 탓하는 여인같이 마음 곱게 눈은 내린다. 눈이 물이라는 것도 모르는 멍청이같이, 내리다가 지다가 쌓이다가 녹다가 녹고 마는 소인 같이 눈은 내린다. 먼 광야 향기로운 초원의 오줌에서 피어나는 김같이 모락모락 눈은 내린다.”( 「눈」, 부분)

위 수필에서 보듯이 호운의 ‘눈’은 ‘너는 나같이 나는 너같이 눈은 내린다.’에서 작중 화자와 ‘눈’을 동일시하고 있다. 작중 화자는 쓴 막걸리에다 소주를 섞어서 마시는 막소주처럼 인생은 고달프고 세상이 각박해도 하늘이 베풀듯이 ‘눈’이 내리는 것을 묘사한다. 불상한 걸인의 시체를 덮는 이불처럼 눈은 오는가? 울어주는 이 없는 것처럼 내리다가 너무 많아서 싱거우면 올라가다 내리듯이 눈은 내린다. 그리하여 내가 돌아갈 날을 위하여 눈은 내리고, 이제는 더 올라가다 다시 내려와 마른 눈물처럼 인생은 그렇게 내가 돌아갔다가 돌아올 날이 노승의 독경소리 같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각’으로 도달되고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산사의 정적만이 노승의 무위처럼 우리의 인생도 다시 돌아올 기약 없는 눈처럼 내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범박하게 호운 박항식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보았다. 그는 인간과 사물과의 교감을 통해 맑고 담백한 서정 미학을 펼친 신념의 시조시인이다. 따라서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며 현재와 미래가 하나 되는 순수직관의 세계를 희구했다. 더불어 그는 아내 강영진과 5남매가 엮은 가족동시집을 내는 등 가정에도 충실한 가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거침없이 쓰러졌던 지도자”같이 제자 사랑도 지극했다. 호운의 시와 글을 모아 더 풍부한 연구가 이루어져 기쁨으로 출렁이길 바란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