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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학술강연회 주제발표 내용] “전북 항일운동, 전국서 가장 격렬”
[3·1 운동 학술강연회 주제발표 내용] “전북 항일운동, 전국서 가장 격렬”
  • 이용수
  • 승인 2020.03.2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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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우 “전라도, 의병활동 중심 무대”
이명화 “문화투쟁, 독립운동 한 방략”
김종수 “독립의군부에 전북인물 많아”

한말 전북 의병 활동은 어떻게 전개됐고, 3·1만세운동 이후 전북의 항일독립운동은 어떻게 전승됐는가. 또 항일무장투쟁과 그 결이 다른 문화투쟁은 어땠는가.

26일 열린 ‘3·1 만세운동과 전북의 항일 독립운동 전국 학술강연회’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자리였다.

이날 학술강연회에는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의 ‘한말 전북의 항일 의병활동에 대한 재검토’, 이명화 도산학회 회장의 ‘한국독립운동의 항일문화투쟁상과 전북의 문화투쟁’, 김종수 군산대 사학과 교수의 ‘3·1 운동 이후 전북 항일독립운동의 전개’ 주제발표가 진행됐다. 강연회 내용을 요약했다.
 

한말 최익현 의병봉기, 전국 항쟁에 영향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은 그의 저서 <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은 백성의 군대이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해 싸우는 자이다”고 했고,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한바 있다.

한말 의병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친일세력이 장악한 조정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아가며 힘겨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는 점에서 이전 의병활동과는 성격이 다르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면암 최익현은 충남 정산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연재 송병선의 순절 소식을 듣고 의병 봉기를 계획했다. 정읍 태인으로 내려와 봉기했는데, 이는 전국 의병 항쟁에 큰 영향을 주었고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지표가 됐다.

1906년 임실에서는 평해군수를 지낸 강재천이, 남원에서는 양한규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이규홍, 전해산, 이석용, 문태서의 의병활동이 이어졌다.

1908년 10월부터 1만여 명의 ‘호남의병토벌대’가 편성돼 3차에 걸쳐 의병들에 대한 포위 공격을 감행하니, 몇백의 수에 불과한 의병집단은 무너지게 됐다.

전북 한말의병은 1907년 이후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됐는데, 이는 18세기 이후부터 싹튼 자각의식과 민주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 문화운동 가치 재평가를

3·1운동 이후 전개된 문화운동은 크게 ‘봉건적 질서를 개혁해 근대사회로 나가려고 한 경향’과 ‘일제에 저항해 민족 정체성을 보존해 나가고자 문화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항일 문화운동은 일제 식민지 통치를 거부하고 한민족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자 한 몸부림이었다. 일제강점기 교육·언론·학문·예술·종교 등 각 분야에서 항일 문화활동은 직접적인 독립투쟁은 아니었지만, 민족문화의 수호는 물론 국내외 독립운동의 역량을 성장시킨 정신적 에너지가 되었다.

문화투쟁의 한 예는 1928년 4월에 일어난 ‘전북기자대회사건’이다. 이는 일제 경찰이 집회 절차를 문제 삼아 전북지역 신문기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언론 탄압사건이다. 신간회 결성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각종 언론집회 자유 요구에 대한 일종의 견제 조치이기도 했으나, 일제는 전국 언론계뿐만 아니라 호남의 항일적 분위기를 더욱 가열시킬 가능성이 있자 서둘러 무죄 방면했다.

문화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일부 변질되기도 했지만 해방까지 꾸준히 이어졌고, 오늘날 한국문화 전통과 문화발전을 이룩해 나가는 바탕이 됐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문화투쟁의 가치는 독립운동의 한 노선과 방략으로 적극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전북 3·1 운동, 소극적’ 주장은 허구

전북 지역 3·1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소극적인 양상을 보였다고 인식돼왔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조선총독부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서 실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1914년에 결성된 독립의군부의 경우, 각 지역 대표 302명 중 전북 인물이 144명으로 다른 곳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북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할 인적 기반이 없어 전북지역의 3·1 운동이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은 허구인 것이다.

전북에서 3·1 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군산 옥구지역으로,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영명학교 교사들에 의해 주도됐다. 임실에서는 3월 10일 오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15일부터 23일까지 시위운동이 전개됐다.

전주에서는 3월 4일 선언서가 배포되고, 13일 천도교·기독교인 150여 명이 시위를 벌인데 이어 14일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6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90명이 체포됐다.

종교계와 학생, 노동자, 농민 등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전북 3·1 운동은 1920년대 이후 농민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의 계층을 다양하게 하는 토대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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