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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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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승인 2020.04.0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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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우석대 교수
이재규 우석대 교수

집으로 두툼한 선거공보 봉투가 왔다. 일부 후보자들의 방송토론과 길거리 인사를 제외하고는 예년의 선거 분위기를 느끼기 힘든 코로나 시국에서 총선 날짜가 코앞이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한다. 세어보니 지역구 후보자 홍보물이 7개, 보궐선거인 시의원 후보가 2, 비례대표 정당홍보물이 12개다. 비례후보를 낸 정당이 35개에 달하는데 몇 정당은 전국에 배포할 홍보물조차 찍지 못해 선관위 홈페이지를 찾아보는 수고를 더하지 않는 한 누굴 내세웠는지 명부를 알 수 없다.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박근혜 사진을 전면에 내건 정당도 두 곳이나 있는 것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방할 수 있는 사회이지만, “모든 노조를 폐지한다”거나 “대통령이 모든 국민의 관혼상제를 챙김”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역구 후보자의 공약도 모두 신기루 같은 건설 공약, 수백 수천 억의 돈을 쏟아 붓는 뻥카들이 즐비하다.

공직자를 투표로 선출하는 선거는 지지하는 정당과 인물을 밀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권자인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말을 몰아가는 채찍질이 본질이다. 누구를 열혈 지지하여 그가 어떻게 변심하든 연심을 거두지 않는 추종, 정치 소비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정치인들을 몰아세우는 참여가 선거라는 과정의 알갱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로 제시되는 ‘주권재민’에서 핵심은 국민에게 ‘있다(在)’는 것이다. 지갑 안에 든 돈처럼 그저 거기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쓰여야 비로소 구현이 되는, 있다 이다. 주권자인 민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실천적 주문이 거기 들어있다. 그러므로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살 때처럼 부지런하게 내 눈 앞에 있는 상품을 살피고 뜯어봐야 한다. 가짜 상품은 반품하고 고발하며 부실한 제조사를 문 닫게 해야만, 매대가 훨씬 보기 좋아진다. 정치 시장에서 상품은 명부로 존재한다. 만지고 뜯어볼 수 없기에 그 이름자가 걸어온 내력과 언행을 살펴서 앞으로 어떻게 일할지 짐작하는 것이 물건을 잘 고르는 첩경이다. 내가 바라는 최고의 상품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면 발길을 거두고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지금 가능한 최선(어쩌면 차차선=차차악)을 골라야 시장이 그쪽으로 움직인다. 구매를 포기하지 않아야 더 나은 상품을 내놓으려고 제조사가 분발하는 이치다.

이번 총선은 참으로 복잡다단한 우여곡절을 거쳐 시장에 명부가 나왔다. 지역구 후보자 선출도 그렇지만 정당의 지향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비례 대표 후보자 명부는 막판까지 요동쳤다. 그 과정에서 아쉽고 답답한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정치는 내 생각과 100퍼센트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0(Zero)이 되는 영역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님 말고’ 단절하며 돌아서는 순간 더 나쁜 것들이 문 앞에서 칼을 들고 기다린다. 정치는 현재 가능한 선택지 중에서 고르고 고르는 일이다. 정당이나 유권자 모두가 거기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분단과 전쟁, 그 이후 수많은 정국의 부침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피눈물 속에서 어디 두고 보자 주먹을 움켜쥐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왔다. 다 죽은 것 같은 잿더미 위에서도 단 한 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쪽으로 길을 뚫었다. 총칼이 목덜미를 겨누는 순간에도 한 잎의 싹이라도 보이는 정치인을 세워 다음 승부의 발판을 마련했다. 며칠 후 투표장에 들어서는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공감하는 지인, 가족들과 함께 공동구매 방식으로 표를 나누는 지혜도 발휘하면서, 내일은 좀 더 나은 명부를 만나리라 기대하면서.

/이재규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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