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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3) 시적 언어의 순수성·인간애 구현한 구름재 박병순 시조시인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3) 시적 언어의 순수성·인간애 구현한 구름재 박병순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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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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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 발간
나라사랑, 한글사랑, 시조사랑의 삼애(三愛) 실천
인생과 자연의 교감 통해 존재론적 자아 형상화
구름재 박병순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 시조시인.

‘무궁할 겨레의 가슴가슴에 불씨 되어 타리라’

박병순(朴炳淳, 1917~2008)은 진안군 부귀면 출신이며 아호는 구름재이다. 2016년에 복원된 생가는 모래재 메타세콰이아의 길 입구에 “구름재 박병순 생가”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스승인 가람 이병기에 이어 한국현대문학사에 시조의 가치와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키고, 시조 부흥에 정념을 쏟았던 구름재 박병순이 살던 곳이다. 1917년 출생하여 1939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 살았던 구름재 선생은 나라사랑도 남달랐으며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어 울타리로 삼고, 한글보급운동에 힘써 우리말글 지킴이로 위촉받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쓰여진 대표적인 시작품은 「무궁화」, 「속금산」 등이 있다.

이후 2017년 구름재 선생의 시비가 생가 마당에 세워졌는데, “구름재 박병순은 애국심과 우리글 사랑이 육화된 불꽃 신념으로 생애를 마치신 한국이 낳은 시조시인이며, 교육자며, 한글운동가로 존경받으면서 나라사랑, 한글사랑, 시조사랑의 삼애(三愛)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이에 높은 뜻을 기리고자 고향 진안에 시비를 세워서 숭고한 정신을 우리의 유산으로 계승하여 천추에 길이 남을 자랑으로 삼고자 한다.” 라는 건립의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비문에는 서정성이 담긴 시조 한 편이 새겨져 있다.

“눈이 탐스럽게 내린다/ 흰나비인 양 춤추며 내린다.// 밀보리 쏟아지신다신/ 가람 스승님 생각도 나고// 어린 맘 절로 신이 나서/ 덩달아 춤을 춘다.// 경칩이 엇그젠데/ 봄눈 탐스럽게 내린다// 보리 풍년도/ 까마득한 옛이야긴데,// 촌색시 봄손님 맞은 듯/ 괜스레 가슴 설렌다.”(「봄눈」 전문 )
 

구름재 박병순 생가.
구름재 박병순 생가.

 구름재 선생의 약력으로는 진안공립보통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다녔으며, 전북대학교 국문학과(1954)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39년 전주사범부속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전주고, 전주공고, 전주여상고, 이리공고, 진안농고, 전라고 등 1978년까지 40년 동안 교직에 헌신하였다. 이후 전주대학교,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시조창작론, 고전세미나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1952년 전주에서 시조문학 최초의 전문지 『신조』를 5집까지 발간했다. 구름재 선생은 전통의 보고인 시조문학의 시조집을 1956년에는 『낙수첩』, 1971년 『별빛처럼』, 2003년 『먼길바라기』 등 12권을 상재하였다. 이외에도 한춘섭, 리태극과 함께 공저 『우리 시조 큰 사전』을 발행하였다.

구름재 선생은 스승 김해강을 통해 처음 시조를 접했으며, 이후 이병기 선생에게 본격적으로 시조를 배웠다. 일제 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시절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 해방 후부터 이병기와 함께 시조부흥에 참여했으며, 신석정, 백양촌, 장순하, 최승범 등과 함께 ‘가람동인회’를 결성하여 한국시조사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철균, 김목랑, 하희주, 장영창 등과 전북문인협회를 창설하였다. 한국시조협회 이사, 가람문학상 운영위원, 1991년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한글 운동에 앞장섰으며 한글학회 이사로 활동했다. 가람시조문학상 공로상,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 공로상 등을 수상하였다.

다음으로 구름재 선생의 시작품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제1시조집 『낙수첩』에서 제4시조집 『새 눈 새 맘으로 세상을 보자』 까지의 초기문학은 그의 인생관과 서정/서경이 일상생활에서 이미지화됨을 알 수 있다.

“총총히 먼 길을 떠난 지 하마 보름도 넘었는데,/ 네 뚫고 간 문 구멍을 아직도 막지 않는 뜻은,/ 그 구멍 넘어 귄이 쪽쪽 흐르던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아침 저녁 선들거리고 비바람 사납게 부는 날도, 네 뚫고 간 문 구멍을 상기도 막지 않은 뜻은,/ 고 구멍 넘어 정이 찰찰 넘치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총총히 먼 길을 떠났듯 어서들 빨리 돌아오라./ 장미꽃 이제도 피고 국화 향기로운 뜨락으로,/ 수없이 찢고 간 문을 바르기 전에 종종걸음쳐 빨리 오라.”(「문을 바르기 전에」 부분)
 

그리고 제6시집 『가을이 짙어보면』에서 제9시조집 『구름재 시조 전집』 까지를 중기작품으로 볼 때 이 시기에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생애 아무리 서럽고 괴로왔대도,/ 임종만큼은 저- 낙조처럼 고와야지……/ 저녁 놀 헤치고 깜박 숨지는 황홀황홀한 저 한 점.// 구름 흩어지며 산산 조각이 나도,/ 서녘 하늘은 마지막 거룩한 잠자리/ 낙조는 빈 하늘 한 가닥 서광으로 남는다.”(「낙조처럼」 전문)

구름재 선생은 쉰 아홉에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장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러므로 후기 작품들은 인생과 죽음에 대한 회고와 사유를 통한 삶의 자세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무시로 틈만 나면 창 너머 먼 길 눈빠지게 지키건만,/ 날마다 밤마다 먼길바라기 수심 깊고 밤도 깊어 조바심/ 온 밤이 대 새도록 어떻다 바라는 당신 나몰라라 하시시는가?/ 차라리 방문을 차고 눈 온 먼 길 떠나갈까 보다.”(「먼길바라기」 부분)

이상으로 살펴본 구름재 선생의 시작품에서 장순하는 “구름재 선생의 시조는 즉생활적(卽生活的)이고 철저한 서정이다. 인정스런 그의 성품과, 생활과 시를 일치”시켰고, 황희영은 “구름재의 시정신은 소박한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활 잡기가 아닌 그의 수많은 작품들의 소재와 주제는 인간들의 아기자기한 삶에서 오고 있다.”고 논하고 있다. 김해성은 “애국 애족관과 자연과 인간의 합일화에 대한 미학”을 피력하였고, 천이두는 “가람의 숱한 제자 가운데 가장 충실한 제자가 바로 구름재”라고 했다. 이은상은 박병순을 교육자와 시인으로서 순수성을 가진 ‘맹물’로 비유했다. 백철은 “그의 시적인 경지는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전통적인 시조 형식과 문장이 능숙하여 독자를 감복시킨다.”는 평을 했다.
 

구름재 박병순 시비.
구름재 박병순 시비.

무릇 구름재 선생의 시학은 친자연주의, 휴머니즘, 전통주의, 선비정신이다. 이러한 시적 이념은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가 은유적인 시공간으로 표상되고 있다. “밤은 깊어 갈수록 고적은 사뭇 쌓여 오고”(「한가위」)나, “맑은 닭 소릴 듣자면 초가집 지붕 밑이야 되네”(「초가 지붕 밑에서만」) 등은 고향에 대한 깊은 천착이 드러난다. 그리고 “합죽선 확- 폈다가 활활 부쳐 오므리는 이 한 맛”(「부채」)과 “전통이 벅차게 흐르는 속에 넋을 잃은 이 아침”(「추석」), “밤차에 너를 보내 놓고 흐느끼는 밤이로다”(「밤」) 등에서 삶의 의식에 대한 자아 성찰이 표상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구름재 선생은 시조사랑에 대한 시정신이다. “나는 시를 치레로 하거나, 생활하는 시인보다, 시와 시조를 종교하는 시인으로 살겠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자 나의 실생활이요, 나의 참마음 참모습이다. 나는 자만하지 않고, 자긍과 겸손을 지나, 겸손하게 살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가짐이자 몸가짐이려 한다.”라며 여리고도 단단한 작품세계를 피력했다. 뿐만 아니라 시조는 “혼과 멋, 기교와 창의가 따라야 하며, 시조 창작은 진실과 순수 그리고 정열만이 가능하며, 또 곱고 쉬우면서 밝은 우리말 우리글로 표현된 시조”를 위해 순정을 바쳤다.

“무거운 책보따리를 들고 허우대던 불우한 국어 국문 학도였다. 그러나 한글 전용의 선구자요, 실천자요, 공헌자였고, 시조 전문지의 효시 ‘신조(新調),의 주재자로 시조 문학 부흥과 시조 보급 운동의 거점을 이룬 끈질긴 과감한 투쟁자였다. 한글을 사랑하고 시조를 종교하는 민족 시인으로 가람의 뒤를 이은 한국의 별로 살다 간 가냘프고 고달픈 순결한 대한의 교육자였다.”(「비명(碑銘)」 전문)

따라서 구름재 선생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인 전통문학인 시조의 계승을 위해 자신의 시학을 올곧고 정성스럽게 수행하며 현대시조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새 눈으로 자연을 보고 새 맘으로 세상을 보며 어질고 착하고 맑고 곱게만 세상을 살았던 구름재 박병순. 그는 현대시조 정착을 위해 시조사랑의 순수성과 인간애의 구현을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천명을 하늘에 걸었다. 그리하여 오직 한 평생 시조와 함께 길을 걸으며 무궁할 겨레의 가슴가슴에 불씨 되어 죽는 날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는 시조시인이었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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