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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2020 시민기자가 뛴다] 지역 민주화 운동사 재조명해야
[참여&소통 2020 시민기자가 뛴다] 지역 민주화 운동사 재조명해야
  • 기고
  • 승인 2020.05.1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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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남도청 앞에 있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 이야기
1987년 원광대학교 공과대학 옆 잔디광장에 세워진 임균수 열사 추모비.
1987년 원광대학교 공과대학 옆 잔디광장에 세워진 임균수 열사 추모비.

곧 계엄군이 올 거야, 형은 괜찮으니 어서 집에 들어가!”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을 앞에 두고 고등학생인 이 군은 집에 가야 했다. 형, 누나들과 함께 이 자리에 남겠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소리치는 대학생 형의 말이 이 군의 발을 집으로 돌리게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총소리와 군홧발로 짓밟는 소리, 비명과 신음소리가 도청 광장을 뒤덮었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온통 범벅이 되었지만 이 군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이불 안에서 숨을 죽여 울었다. 시신안치소로 쓰이던 상무관에 누워있던 이들과 시위하던 사람들을 비롯해 모든 광경이 여전히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생생히 재생 중이다.

1980년 5월,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이 군은 2020년 장년이 되었다. 이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들어선 옛 전남도청을 지나며 이영진(가명)씨가 말했다.

“그때에는 계속 광주 시내 여기저기에서 시위가 있었지,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광장에 하나둘 모였고 ‘아침이슬’을 불렀어요. 지나가던 이들도 그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면 사복 차림의 경찰이나 군인들이 그들을 구타하고 시위가 진압되면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부하던 이들은 계속 공부를 하고, 어딘가로 가던 이들은 그들의 목적지로 걸어갔어, 지금도 그때의 모든 일들이 어제처럼 생생해요.”
 

영원히 이십대 청년으로 남은 이름, 이세종과 임균수

김제 출신 이세종 열사의 고교 시절(왼쪽). 임균수 열사의 부친 임병대 씨.
김제 출신 이세종 열사의 고교 시절(왼쪽). 임균수 열사의 부친 임병대 씨.

1980년 5월 민주화 분위기가 고조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포함 전국으로 확대했다. 김제 출신의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열사는 전라남북도 대학 연합체인 ‘호남대학총연합회’의 연락 책임자였다.

1980년 5월 17일 그날 밤 이 열사는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 동료학생 1백여 명과 함께 ‘비상계엄 철폐 및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가 건물에 진입한 7공수 부대원들에게 쫓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5월 18일 새벽, 그는 온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되었다. 검찰은 이세종 열사의 사인을 학생회관 추락사라고 발표했지만 당시 주검을 검안했던 전북대병원 이동근 교수는 “당시 이씨의 주검에는 검안서상의 손상 외에도 가슴과 등, 옆구리 등에도 타박상이 있었으며 골절의 양상도 모두 복합골절이었다”라며, “집단 구타 없이 단순 추락만으로는 그런 상처가 생길 수 없다“라고 추락 전 계엄군의 집단 폭행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의 동료들이 1985년 5월 18일에 모교인 전북대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세웠으나 당시 당국의 탄압으로 두달만에 시신이 안치된 생가로 이전해야만 했다. 그의 추모비는 1989년이 되어서야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며, 1995년 이세종 열사는 모교 전북대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1980년 5월 21일, 원광대학교 한의대 본과 2학년생 임균수 열사는 전남도청에 있었다. 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휴교령이 내려진 5월 17일에 예정된 봉사활동을 취소하고 집이 있는 광주로 간 것이다. 한의대 재학 시절에도 임 열사는 민주화에 대한 관심과 열망을 지닌 청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날 계엄군이 오후 2시를 기해 후퇴할 터였다. 시위에 함께 해 온 모든 이들이 전남도청 앞에 나왔고 오후 2시가 되자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탄사격이 가해졌다. 총상으로 인해 임균수 열사는 이날 22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전두환 정권이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시위 중인 광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헬기 기총소사 등을 이용해 학살(제노사이드)을 자행한 그날, 그때이다.

영원한 청년으로 남은 아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임균수 열사의 부친 임병대 씨는 아들 몫의 보상금과 사재를 털어 무등·경산 장학금을 설립해 1987년부터 매년 100만 원씩 장학금을 기탁해오고 있다.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를 지내고 퇴임한 임씨는 장학회를 큰아들에게 승계해 아들의 뜻을 이어갈 계획이며, 장학금은 아들의 모교인 순창북중(순창고)와 원광대 한의대 본과 2학년생을 위해 쓰이고 있다. 1987년 세워진 임균수 열사 추모비는 현재 원광대학교 공과대학 옆 잔디광장에 있으며, 임 열사는 1997년 5월 국립 5·18민주묘지 제1묘역 47번에 안장되었다.
 

전북지역에서의 민주화 운동

1980년대 전북대·원광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전북대·원광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발생하자 4월 19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북에서도 신흥중·고교, 영생고교, 전북대학교와 원광대학교 학생들의 데모와 함께 임금을 두고 노동자들의 쟁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 전북대학교와 원광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투쟁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민주화 투쟁에서 여대생들의 역할 또한 지대했다. 그들은 시위를 주도하거나 데모가 있을 때마다 밥을 짓는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5년 9월 13일에는 전북대와 원광대, 군산대, 우석대 4개 대학 연합 주최로 ‘민중민주화운동탄압 성토대회’가 있었다. 1980년대에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 전부 유세 저지 투쟁이 있었으며, 전두환 구속 투쟁과 함께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원광대학교 숭산 박길진 총장을 비롯한 교수들도 “학생들의 말이 맞다”며 어깨띠를 매고 학생들과 함께 시위현장에 있었다. 이 시기 익산에서 열리는 시위와 관련해 전단지 등의 인쇄를 상당수 맡아 한 곳이 바로 원불교 총부에 인접해있는 원광사이다. 6.10 민주항쟁시기에는 창인동성당에서 원광대학교 총학생회와 원광대민주화발전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의 농성이 있었다. 대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알려지자 인근 아파트부녀회에서 밥과 찌개를 끓여 가져오기도 했다.
 

전북 민주화운동, 종합적으로 재조명할 필요있어

1980년 5월 민주항쟁과 관련해 당시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두환의 명령에 의해 시위하던 시민들을 대상으로 헬기기총소사가 있었다는 증언이 사실로 확인되었지만, 그 배후에 북한군이 있다는 주장 또한 여전하다. 이를 최초 주장한 지만원 씨에 이어 우리공화당 이주천 최고위원은 2008년 5월 포커스전북21에 출연해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논란을 빚기도 했었다. 현재 전북 지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자료는 당시의 신문기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정리한 구술자료와 보고서 등이 있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민주화운동 또한 산재해있다.

임균수 열사의 친구이자 당시 학생운동을 함께 한 익산시 소재 함께가는 한의원 강익현 원장은 “전라북도의 알려지지 않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료를 발굴해 그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이 현대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말처럼 전북의 알려지지 않은 1960년대~199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사실이 보다 종합적으로, 많은 도민들이 접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전북의 현대사가 정립되기를 기대해본다.   /이희수 원광대학교 LINC+사업단 지역선도센터 담당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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