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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70주년] 역사의 현장, 도민의 ‘눈’ 전북일보
[창간 70주년] 역사의 현장, 도민의 ‘눈’ 전북일보
  • 엄승현
  • 승인 2020.05.31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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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 창간한 전북일보는 전란의 현장을 민중에게 전달하는 ‘눈’이었다.

전란 후에는 폐허의 보릿고개를 민초와 함께 견디며 역사의 증인으로서 현장을 전달했다.

세대가 바뀌고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전북일보는 매 순간 독자들의 눈과 귀가 되며 함께 울기도 웃기도 했다.

역사의 주요 순간 독자와 함께 했던 전북의 70여년의 주요 사건·사고를 정리했다.

 

1950년 6·25 전쟁 속 창간

1950년 10월 15일 전북일보는 발행 초창기 전시 상황을 알리는 전령사였다. 라디오나 TV가 없던 시절, 유일한 도민들의 언론매체였으며 1953년 정전협정이 이뤄질 때까지 전북일보의 1면 기사는 주로 전쟁 관련 기사가 주를 이뤘다. 1952년 7월 20일자 전북일보는 ‘수억만원에 달하는 재산 소진은 그만두더라도 도내에서 1만 8000여명이 생죽음을 당했다’며 당시 참혹한 상황을 기록했다. 1956년 7월에는 이틀간 남원과 장수 지역에 내린 240ml의 폭우로 21명이 사망, 87명이 부상을 당한 소식을 전했다.

 

1960년대 곰티재 참사와 고등학교 화재

1965년 4월 20일 전북대 법대, 문리대, 상대, 농대 등 4개 학과 500여명이 ‘어민들은 통곡한다 사수하자 평화선’이라고 쓴 플랜카드를 들고 한일 협상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전·군 도로 가는 길을 막고 시위를 벌이다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경찰은 곤봉과 최루탄으로 학생들을 해산하려 했으나 잠종장(지금 전북대 정문 부근) 철길까지 밀린 학생들은 철길서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1966년 6월 6일 오후 5시께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속칭 ‘곰티재’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로 15명이 숨지고 54명이 부상을 당했다. 특히 공휴일이라 다음날 학교를 가기 위해 차를 탄 학생들의 희생이 많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1969년 5월 26일 전주고등학교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학교 후관 2·3학년 교실 19곳과 물리화학 실험실 교실 21곳이 모두 탔고, 전주 북중학교 본관 교실 23곳이 전소돼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 망연자실했었다. 화재 현장에는 전주소방서 소방대원을 비롯해 학생, 교사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삽시간에 번진 불로 건물은 앙상한 뼈대만 남겼다. 어처구니없게도 범인은 전고 재학생으로 밝혀져 온 시민이 경악해야만 했다.

 

1970년대 남원역 열차 대규모 인명피해, 이리역 폭발

1971년 10월 13일 오전 7시 30분. 남원역 열차 192호가 남원국민학교 6학년생 158명을 태우고 전주로 출발했다.

이 열차는 남원역에서 1.5Km가량 떨어진 고갯길 오르막을 달리던 중 갑자기 기관 고장 멈춰 섰다. 그러나 브레이크 기어가 빠져 후진했고 당시 구내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조 화물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또 당시 유조 화물차 후미에 있던 또다른 유조 화물열차와 연쇄 충돌하기까지 했다.

이날 수학여행길에 올랐던 남원초등학교 학생 중 20명이 숨지고 승객 등 5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1975년 4월 19일 완주군 비봉면 봉산리 비봉 탄광에서 낙반사고로 막장에서 작업을 하던 인부 2명이 매몰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직후 50여명의 광부가 동원 130m에 갇혀있던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 50여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출돼 가족품으로 돌아갔다.

비봉탄광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전북에 유일한 탄광이었으며 왜정 때부터 운영되었으며 해방 후 폐광되었다가 1962년 다시 시작해 1987년에 인부가 없어 폐관되었다.

1976년 6월 10일 무주 내도리 남대천에서는 나룻배 전복해 탑승객 6명 사망으로 인양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나룻배에는 6명 외에도 11명의 성인과 아이들이 더 탑승하고 있었는데 구조대책 본부는 이들의 사체 역시 인양하기 위한 수색을 이어갔다.

전북일보는 당시 사고로 두 딸을 잃은 어머니의 인터뷰와 희생자 어린이가 쓴 일기를 보도하면서 당시의 참혹한 사고 현장을 보도했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께. 이리시(현 익산) 창인동 이리역 구내 입환 4호선에 정차 중이던 폭발물적재 열차가 폭발, 시가지를 삽시간에 폐허로 만드는 사상 최악의 참사를 빚었다. 당시 인명피해는 사망 56명, 실종 2명, 중상 184명, 경상 1158명이며 재산피해는 55억원, 철도 관계 피해 23억원 등 모두 78억원으로 집계됐다. 이재민은 무려 1만명에 달했다.

폭발 지점으로부터 직경 16km 이내의 건물은 폭음으로 진동, 가옥 675동이 전파됐고 1289동이 반파되는가 하면 호남, 전라선의 모든 열차는 새벽 6시까지 운행이 두절됐다.

전북일보는 사건 경위 및 피해, 사망자 명단을 게재하는 등 한 달 이상 집중 보도하면서 도민들의 이해를 도왔고 끊임없이 사고 원인을 파고들었다. 당시 사고 차량은 인천시에 있는 한국화약 주식회사의 화학약품인 다이너마이트 흙 폭약, 뇌관(36상자) 등 1139상자의 폭발물을 싣고 인천에서 출발, 광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만취한 호송원이 촛불을 켜고 자다가 불이나 발생한 것으로 밝혀져 시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부터 대규모 피해 화재까지

1980년 5월.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절규가 뒤덮는 가운데 전북에서도 학생들 데모가 끊이질 않았다. 계엄 해제, 유신 잔당 척결, 병역 집체 훈련 반대, 어용 교수 퇴진 등 구호를 외치며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전북일보는 1980년 5월 3일자 보도에서 격렬했던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현장을 고스란히 담았다. 지면에는 학생과 경찰의 충돌했던 모습도 고스란히 담았는데 이 충돌로 경찰과 대학생 130여명이 다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1981년 9월 7일 오후 2시 40분께 전주 동서로의 지하상가 고려여관과 객사 사이 48m 옹벽 갈라져 내려앉았다. 사고 현장에는 방수공사 등을 진행하기 위해 인부 60여명이 있었으나 땅이 무너지는 소리에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전북일보는 체전을 대비해서 급하게 지은 탓에 부실공사를 했을 가능성과 더불어 설계 부실에 대한 문제를 제시했다.

특히 설계 부실로 밝혀질 경우 지하상가 일대 구전주극장과 고려여관 사이 구간, 객사에서 서울신탁은행 구간까지도 해체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했으며 동시에 지하상가를 둘러싼 시민들의 의견을 담기도 했다.

1982년 1월 8일 자정 군산시 소재 세대제지 제품 창고에서 불이 발생해 약 35억여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났다. 이날 불로 2600백여평 상당의 창고 3동을 태웠으며 오전 9시가 돼서야 진화됐다. 큰불로 소방대원과 공장 종업원 등이 함께 진화작업을 벌였으며 과정에서 소방대원 1명이 다치기도 했다.

1982년 7월 10일, 410, 호남 최초로 세워진 사립고 명문인 전주 신흥고가 10일 새벽 4시 24분께 본관과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에 불이 나 모두 탔다. 본관 2층 3학년 2반 교실에서 시작된 이날 화재는 교실 8칸 등 1322㎡(400여 평)가 전소됐으며 다행히 학적부나 경리장부 등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없었다. 신흥고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WD 레이놀즈가 1900년 9월 9일 사립계 고등학교로 설립했다.

신흥고의 건학 이념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사람을 기른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화재로 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1985년 3월 29일 오전 11시경 서해에서 표류 중이던 중공해군 어뢰정(40t급 P6) 한 척이 우리 어선에 구조, 예인돼 부안 하왕등도에 정박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서해 소흑산도 근해에서 조업을 마치고 귀항 중이던 우리 어선 제6어청호가 중공군 어뢰정이 구조를 요청해 예인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중공어뢰정 사건 경위를 “어뢰정에 타고 있던 승무원 2명이 상관에 불마을 품고 6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처벌이 두려워 공해상을 전전하다 연료가 떨어져 표류하던 중 우리 어선이 구조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정부는 중공과 외교협상 타결로 어뢰정과 승무원 전원을 28일 오전 서해 공해선상서 중국에 인도했다.

중국 군용기 한 대가 1985년 8월 24일 오후 이리시(옛 익산시) 신흥동 신흥마을 앞 농수로 제방 밑에 불시착했다. 국방부는 이 사고로 승무원 한 명이 죽고 한 명은 중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신병을 보호 중이라고 발표했다. 사고기는 신흥마을을 두 번 회전한 뒤 논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이 마을 농부도 한 명이 숨졌다.

불시착한 중국 군용기는 산둥반도를 이륙, 훈령중이던 중국 해군함대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외교적인 측면을 신중히 검토한 후 국제관행에 따라 이 사고를 처리했다.

1986년 12월 6일 금산사 대적광전(보물 476호). 조선 중기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던 금산사 대적광전이 6일 0시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가 보물 47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과 보살 상좌, 오백나한 불상과 탱화 등이 있었다.

화재 신고를 받고 달려온 전주 소방서·김제 소방서·의용소방대원들을 비롯해 스님들까지 총 120여 명이 진화에 나섰으나, 세찬 바람까지 불어 새벽 5시경이 되어서야 불길이 잡혔다. 450년이나 된 목조건물인 대적광전은 뼈대만 앙상히 남은 시꺼먼 숯덩이로 변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987년 7월에 중부지방에 쏟아진 집중호우와 태풍 셀마가 겹치면서 전국적으로 물 폭탄을 입었다. 이때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만 해도 153명에 달했으며, 침수된 농경지는 19만4000ha 재산 피해는 약 1000억 원이었다. 전라북도 역시 피해가 컸다. 특히 익산 일대에는 최대 291mm의 비가 쏟아져 가옥 47동, 도로 37개소 2313m가 붕괴되거나 유실됐다. 만성면 일대도 물에 잠겨 수백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1989년 10월 27일 오전 11시경 전주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한진고속버스가 승객 24명을 태우고 운행하던 중 도색작업을 하던 타이탄 트럭을 들이 받아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16명이 불에 타 숨지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체는 인근 논산 백제병원에 안치됐으며, 부상자는 전북대병원으로 후송 치료를 받았다. 현장에는 시신을 알아볼 수도 없게 검게 타 버렸으며, 버스와 트럭도 뼈대만 앙상히 남아 사고 당시의 처참함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페리호 참사

1991년 4월 30일 학원자주화 투쟁에 참여한 강경대 학생을 경찰이 집단 구타해 사망하게 만든 사건은 살인정권에 대한 도내 학생들을 분노하게 했다. 거리에 나선 5000여명의 학생들은 강경대 군에 대한 추모와 정권을 향한 규탄 집회를 벌였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은 집회와 동시에 학내에서도 규탄 집회를 이어갔고 수업 거부도 이어갔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15분께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앞 격포기점 4.5km 해상. 앞서 9시 40분께 승객 342명을 태우고 위도 벌금항을 출발, 격포항으로 향하던 군산 서해훼리사 소속 110t급 여객선이 침몰했다. 이 사고로 승객 292명이 숨지고 70명만이 배에서 떨어진 구명복과 낚시용 얼음상자 등에 매달려 있다 주변에서 조업 중인 어선들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전북일보는 10일자로 2개면의 호외를 발행하고 11일자에는 1, 2, 3, 13, 14, 15면 등 6개면에 사고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풍랑속에 기우뚱하면서 정원을 초과한 여객선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전북일보는 정원을 초과한 무리한 항해가 2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며 대형 참사는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점을 지적했다. 바다에 가라앉았던 배는 우여곡절 끝에 사고 발생 17일만인 10월 27일 인양됐다. 이 사고 후 종합적인 위도종합개발이 본격 추진됐다.

 

2000년대 태풍 루사 피해, 백 경사 미제 사건

2002년 1월 29일 대낮, 군산 개복동 성매매집결지인 속칭 ‘감둑’ 거리 한 업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11명의 윤락여성이 숨지고 3명이 중태에 빠지는 대형 참사(결국 14명 사망)가 발생하자 도민들은 경악했다. 앞서 2000년 9월 19일 오전 사고현장 인근 대명동 군산역 앞 속칭 ‘쉬파리골목’ 매매춘 업소 화재로 5명의 여성이 숨지는 사건과 너무나 유사해 당국에서는 과연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전북일보는 2000년 화재방지시설이나 환기시설 등이 없이 영업을 해온 점 등을 지적하며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또 하나의 인재로 단정하고 철저한 수사와 대책을 촉구했다. 특히 9월 24일과 10월 13일에는 각각 ‘숨진 윤락녀의 일기장’과 ‘생존 윤락녀의 검은 커넥션 진술’을 단독 보도해 경찰과 행정당국에 대한 여론의 비난은 극에 달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1년 4개월 만에 또 화재가 발생하자 전북일보는 여종업원들이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현대판 노예상활을 했던 사실을 알렸다.

2002년 8월 31일 도내 상륙한 태풍 루사는 지리산 뱀사골에 505mm, 남원시 운봉에 4백76mm가 넘는 비를 뿌리면서 31일 밤과 1일 새벽 사이 지역 남부와 동부 산간지역 등 도내 전역에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루사’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 6명, 실종 2명, 부상 10여명 등이며 남원과 장수 무주등에서 2백64가구가 침수되거나 파손돼 7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또 무주군 등 4개 시군 540여가구 1300여명의 주민들이 긴급 대피하기도 했다. 재산피해도 잇따라 논과 밭 등 1만1700여㏊가 비피해를 입었으며 가축 4만여수, 가로수 1600여본, 전신주 1100여개 등이 파손되기도 했다. 루시의 상처는 전북 도민들을 단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사고로 박효심씨가 매몰됐다 구조됐는데 당시 태풍으로 인해 후송이 어려운 상황에서 도민들은 릴레이로 환자 후송을 했다.

면직원과 경찰, 주민들은 박씨를 들 것에 실은 채 뛰어 릴레이 형식으로 10km 가량을 도보로 후송해 병원 응급실로 박씨를 이송했다. 전북일보는 당시 현장의 이주민들의 목소리와 참사 현장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했다.

2002년 9월 20일 오전 12시 50분께 전주시 금암2파출소 백선기(당시 54) 경사는 혼자 근무 중이었다. 동료들은 순찰을 나간 상태였고 이후 돌아온 동료들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백 경사를 발견했다.

목과 가슴 등이 흉기에 찔려 쓰러져 있던 백 경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또 현장에서는 백 경사가 소지했던 38구경 권총과 실탄 4발, 공포탄 1발이 함께 사라졌었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용의자 3명이 검거했다. 20대 초반인 이들은 2003년 1월 15일 전주 시내 한 음식점에서 절도 행각을 벌이다 백경사에게 붙잡혔던 이들이었다. 조사에서 이들은 피살사건 4개월 전 무면허로 오토바이를 타다 백 경사에게 단속을 당한 뒤 오토바이를 훔치기 위해 파출소로 갔다가 용의자 중 한 명이 소지한 흉기로 백 경사를 찌르고 권총을 탈취해 달아났다고 진술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들은 기존 진술을 뒤집고 경찰의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경찰은 용의자들이 사용했던 흉기와 훔친 권총을 찾지 못하면서 결국 용의자들은 풀려났고 시민단체 진정으로 조사를 벌인 국가인권위는 당시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해당 사건은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채 도내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2003년 5월 12일 오전 2시께 익산시 망성면 어량리 (주)하림 공장 내 정온실에서 전기합선으로 추정되는 불이 나 지하 1층, 지상 3층 본관 사무동과 도계시설, 전기·냉장시설 등 6개동 2만2800여㎡가 모두 소실됐다.

이 화재로 건물 등 직접 피해액은 100억원대로, 생산차질에 따른 피해액을 합치면 손실액은 무려 9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도 소방본부가 재산피해액을 기준으로 집계한 도내 10대 대형화재 피해 누적액(36억원)을 크게 웃도는 것으로 사상 최대의 화재로 기록되기도 했다.

국내 시장의 40%를 점유, 연간 매출액만 4000억원이 넘는 하림공장 화재는 지역 경제에 파장을 불러왔다. 하림에 물량을 공급하는 육계농가만 700여개. 이중 도내 농가는 480여개로 절반이상을 차지, 생산라인 중단 여파로 육계농가 등 협력업체의 피해가 잇따랐다. 하림은 화재로 인한 생산 유휴인력을 경북 상주공장에 파견해 생산라인을 풀가동하는 등 피해 최소화에 주력하는 한편 신축 공사로 재건에 나섰다. 도민들 역시 하림의 재건을 위해 다방면으로 지원에 나섰는데 도내 기업들부터 마을 주민들까지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도내 기업 살리기에 나서기도 했다.

 

2010년대 공개수배까지 이끌어낸 미제 사건

2014년 7월 16일 정읍 한 공사장 폐정화조에서 백골사체가 발견됐다. 부검결과 백골사체는 5년전 실종된 A씨(당시 37)였다. A씨는 앞서 2009년 4월 20일 실종신고가 접수됐었다. 경찰은 실종 현장에서 A씨의 혈흔 등을 발견하고 그를 살해했을 유력 용의자로 그에게 돈 50만원을 빌렸던 성치영씨를 지목한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A씨의 사체가 발견되지 못하면서 체포할 수 없었다. 이후 경찰은 성치영에 대한 법원의 체포영장을 발부받았지만 이미 잠적한 뒤였다.

당시 사건이 발생한 뒤 경찰은 지속적으로 수색을 이어갔지만 성치영은 끝내 발견되지 못하면서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그러나 본보의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보도로 경찰은 성치영에 대한 공개수배를 결정했고 현재 공개수사로 전환해 성치영의 뒤를 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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