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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십리, 그 모래밭을 걷자
명사십리, 그 모래밭을 걷자
  • 기고
  • 승인 2020.07.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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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호 한국예총 전북연합회장
소재호 한국예총 전북연합회장

명사십리란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우는 소리를 내는 모래톱이 십리에 뻗쳐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명사’는 이미 그 스스로가 청정지역임을 전제한다. 맑고 깨끗한 것끼리 서로 부대껴 아름다운 소리가 유로(由路)됨을 이르는 어휘이다. 모래란 단결과 응집의 반대편 개념을 형상화하는 단어이다. 개별적, 독단적, 단일적, 단절적 개체개체가 불화의 이미지로, 뭍과 물의 경계지점에 모래톱으로 엎드린다. 작은 ‘하나들’이 모여 여럿이 함께 있다. 어느 민족이나 사회 단체의 단합되지 못하는 형국을 모래같다고 일러 왔다. 그런데 필자는 그 모래에 대한 역설을 쫒고자 한다.

정갈하고 깨끗하고 햇볕에 눈부시게 빛난 연후에라야만, 가만가만 걷는 연인끼리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니까 모래가 우는 것이다. 그 소리가 음침한가? 그 소리가 불쾌한 탁음인가? 아니다. 수평선으로 달려나가는 파도 소리와 연인끼리 동반하여 걷는 소리가 함께 조화롭고 아름답다.

코로나19의 음험한 시대가 역설적으로 우리 문명한 인류를 원시의 모래밭으로 퇴화(?)시키고 있다는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폐칩과 폐쇠와 단절과 분산과 분쇄와 이룩된 것들의 와해를 코로나19는 획책한다. 일찌기 있었던 것, 거대하고 웅장했던 것, 본질이 존재에 선행하여 효용성의 부가가치를 최고로 누렸던 것, 이런 모든 것을 뒤로 돌린다.

모래란 애초에 거대한 바위산이 낱낱의 작은 알갱이로 쪼개져서 계곡물에 휩쓸려 나와 모래밭에 누운 게 아닌가? 모래는 존재에서 비존재로 나아가는 중간 매체의 잠시 존재의 형상이 아닌가?

코로나가, 모래를 할퀴던 저 풍상우로처럼, 시대의 모든 상황을 바꾸는 강력한 변인으로 등장하였으니 어찌할꼬? 지금껏 있어 왔던 인류 문명을 지난 적 원시로 회귀시키는 이 엄중한 명령(?)을 이찌할꼬?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신념대로, 우리의 의도대로 지켜나가고 새로운 모랄을 세울 때까지 개별자끼리 연대해야 한다. 신성하고 생동하는 생명끼리 연대해야 한다. 모래는 적당한 시기 연후에 모래성을 이룬다. 수십층의 고층 빌딩으로 선다. 그래서 우리는 명사의 모래 위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칙칙하던 모래톱을 새로운 물결로 휘쓴 뒤 명사를 펼쳐야 한다. 전화(轉化)로 위복(爲福)을 삼아야 한다. 인습이니 관습이니 다 바꾸자. 제도는 민중의 것으로 채우자. 낡은 문명은 다 뜯어 다르게 고치자. 단체, 사회의 개념을 개인주의 총화로 대체시키자. 질서도 윤리 도덕도 생태학적 생명공학적 양태로 환귀시키자. 모든 가치관도 공리주의도 변모시키자. 인간 위에 군림하며 존재하는 모든 위력 말하자면 권력이나 무형의 힘도 분쇄시키자. 코로나가 지금 하고 있는 방식처럼.

모래는 모래끼리 연대하고 연쇄해야만 모래 울음을 낸다. 십리가 명사가 되는 것이다. 사각거리며 생명하는 소리를 연출하자. 원융하는 것이다. 돌고 돌아 융생하는 것이다. 곤충 한 마리와 풀 한 포기와 인간 한 마리가 똑같이 등가적으로 생명의 가치가 셈이 되어야 한다. 제5빙하기가 오기 전에 새로운 생명운동을 일으키자. 과학은 천천히 다음으로 뒤따르라 하자.

이러저러한 화두가 코로나19의 웅변이자 궤변이 아닌가?

인류여! 가만히 먼동이 트는 아침에 명사십리를 걸어라.

 

△소재호 회장은 전주 완산고 교장,전북문협회장,석정문학관장, 표현문학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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